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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Sep 22. 2022


학교 동기들과 집단상담 스터디를 진행했고

그렇게 우리는 나름대로 집단상담을 하고 있다.


집단상담에서 시작은 별칭을 짓는 것부터 출발했다.

나를 설명하는 많은 단어들.

그 수많은 특징들 중에서 나는 무라는 별칭을 만들어 내었다.


별칭을 설정하는 것에 많은 부담이 따랐다.

삶이 끝나지 않는 이상,

아니 삶이 끝난다 한들

나의 존재는 여전히 과정안에 있다.


그 과정안에서 나란 사람은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여전히 경험하고 있고 또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게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여 별칭을 부여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나는 나를 단정짓는 말을 많이 내뱉는다.

어쩌면 블로그에 남기는 나의 기록들이 나를 단정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ESTJ이니,

외향적이니,

혹은 이성적이니,

밝니,

나댄다느니,

감정이 결여되어있다거나,


어떨 땐 긍정적으로, 어떨 땐 또 부정적으로

나를 포장한 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옥죄어 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ESTJ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나의 모든 행동은 ESTJ의 특성을 따라간다.

분명 내 안에는 모든 유형을 품고 있을 텐데,

상황에 따라 나는 내향적이기도, 외향적이기도

상황에 따라 나는 이성적이기도, 감정적이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일텐데

나를 특정해버리는 순간 그 틀에 갇혀

나의 모든 사고와 언행은 그 틀안에서 과도하게 발현되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멈추어있는, 어떤 것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그렇기에 본질로서 내가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그 순간의 나로서 판단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나는,

내 안의 특정지어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에

어느 순간 나를 규정짓는 말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블로그에 나를 분석하는 글들도 불편해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나를 없을 無라고 소개했다.

나는 나를 특정 짓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어떠한 프레임에 가두어 단정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당신들을 프레임에 넣어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없을 무 입니다.


집단상담 스터디가 끝나고 난 며칠 후,

나는 무라는 닉네임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무와 관련하여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 계속해서 떠올라 검색을 해보았다.

그리고 어떠한 블로그에서 없을 무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이런 뜻을 가진다. 의식의 주인은 누군지 알 수 없고, 의식은 항상 자기 바깥으로 나가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의식은 아무런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텅 비어 있다.’ 의식은 텅 비어 있기에, 의식의 본질은 ‘무’라고 일컬어 질 수 있다. 의식의 본질이 ‘무(無)’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의식의 본질이 ‘무’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격, 가정환경 등은 단지 의식의 대상일 뿐이지, 의식을 구성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가령, ‘나는 성격이 급해서, 이런저런 행동을 했어’. ‘나는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어.’ 이와 같은 문장들은 우리 의식의 배후를 밝히는 문장이 아니라, 단지 의식의 대상들이라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의식은 본질이 없기에, ‘하나님이 나의 의식을 창조하셨어.’와 같은 신학적인 견해 역시 의식의 대상일 뿐이지, 의식의 본질을 밝히지 못하는 견해이다. 의식의 본질이 없다는 것, 이것의 의미는 의식의 존재는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출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 사르트르 타자론 I|작성자 한울



맙소사.

이 글에서 내 생각을 읽은 마냥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나는 변화하는 과정중에 있는 무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기도, 저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특정짓는 규정된 말은 너무나 많으면서도 또 없습니다.

나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겠습니다.

팔땡 엄마, 학생, 주부, 누구의 아내로서의 정해진 본질이 아닌

나는 실존하는 존재인 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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