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빈 Oct 14. 2022

상담이 옳은 길이라 누가 그랬던가.


상담공부를 하면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다.
아니 여전히 그 딜레마가 해결되지 못했다.

상담을 받으며, 상담공부를 하며, 상담사례를 접하며
나는 결국 상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두 공통됨을 느꼈다.
공존과 행복.

한편으론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결코 혼자서 살 수 없다.
꼭 타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만을 보지 않더라도,
내가 쓰고 있는 연필 한자루만 보아도 그러하다.
연필 한자루에도 여러 이들의 노고가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의 협동이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
우리 또한 부모가 존재했기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롯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일 수 있다.

상담에서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기에
자신도, 타인도 행복한 (혹은 충분히 괜찮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정신의학과 관련된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모아진다 생각했다.

그러한 공존과 행복을 위해 우리는 상담에서 모두를 같은 길로 인도하고 있진 않은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상담공부를 하며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내게ㄴ
사람들은 인격적 성숙을 해 나가는 과정이니 뭐니
말하지만 나의 성숙에 정답이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향하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선 것 뿐이지요.
라고 답할 뿐이었다.

상담공부를 하면서도 이 길만이 길인가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물론, 이 길을 선택한 나는 이것을 추구해 간다.
나의 가치가 되었고, 나의 신념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가치가 되었다 해서 타인에게 공존과 행복이라는 한가지 방향만을 제시할 수 있냐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상담사는 방향을 절대 제시하지 않는다.
스스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함께 길을 걸어 갈 뿐.

하지만 그럼에도 상담사가 가지는 가치는 분명 존재하고
그러한 가치가 내담자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순 없다.
알게 모르게 상담학에서 무수히 배워온
상담이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진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환자로 치부하고,
누군가를 문제아로 치부한다.
누군가를 역기능적 사고와 행동을 가졌다고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부적응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행동을 수정해 나가도록 돕는 이면에
과연 상담학에서 말하는 궁극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가 이 길을 가지만,
그 누군가에게 내 길이 정답이라 결코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상담에서 뿐만 아니라 육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육아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내가 타인들의 눈에는그런
좋은 엄마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타인들은 내게 육아에 관련된 조언을 많이 구하곤 하지만
나는 늘 나의 길을 추천하지 않는다.
내가 지향하는 길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에 진리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상담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꾸만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상담에는 대가가 만든 이론에서부터 현대의 정신의학 분야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론들을 공부하면서 느낀다.
각기 용어가 다르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모두는 같은 답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길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나는 아직 내리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가치롭다 여겨 걸어가고 있지만
그 방향 역시 결국 인간이 정한 것 아닌가.
많은 이론가들이 정해둔 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절대 선, 절대 악이 없듯,
누군가에게 선이 다른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듯,
투병중인 아내를 위해 약을 훔친 하인츠의 도덕적 딜레마처럼
과연 상담에서 말하는 진리란 모든 이에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왜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가.
왜 상담사는 모두를 같은 길로 인도하는가.
그 또한 인간이 정한 길이 아닌가.
결국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인 공리주의인 것인가.

상담공부를 하며 고구마 백개 먹은 답답함을 여전히 느낀다.
나의 신념은 명확하지만
누군가에게 이것이 정답이라 외치지 못한다.

여기에 대한 답을 나는 여전히 고뇌하고 있지만
답은 찾지 못했다.
아마 상담을 하는 평생동안 나는 내게 되물을 테지만
평생에 답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나의 묘지에는 여전히 방황ing 이라는 비석이 세워질 것이라고.

니체는 철학을 가지지 말라했다.
철학을 가지는 순간 틀에 갇혀 버려 자신을 획일화 되도록 만든다고 했다.

예전 글에서 나는
나만의 철학을 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방황중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질문에 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
답을 찾지 못한 내가,
오히려 내담자를 백지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답을 찾는 순간,
나의 정답이라는 색이 입혀져
내담자의 색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나의 색과 중첩하여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답찾기를 포기했다.
상담의 길을 가며 나는 종종 내게 되물을 테지만
아마도 그때마다 답은 찾지 못할 것 같다.

니체의 말처럼 철학을 갖기보다 때때마다 인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본질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될테지.
철학을 갖지 않고 내담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본질은 더욱 명확해지겠지.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 보려고 한다.

상담의 길이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늘 의심하고,
내담자가 스스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나는 나의 가치를 버리고 내담자와 함께 하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인간이기에 나약하고도 악한 존재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