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엉클써니 Jul 12. 2022

네 자매(feat. 둘째 동생)


나는 요즘 표현을 빌어 


"K장녀"이다.


나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 


남들 다 있는 


아들 하나 낳아보겠다고


4명을 낳았으나 모두 딸이었고,


우리 엄마는 여기에서 포기했다.


(아버지가 집안의 막내였기에 


굳이 대를 이을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아들 하나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잔소리라도 할 법한 


나의 친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잠깐 옆길로 빠지자면,


나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남편의 어머니는


딸 넷을 낳고도


종갓집의 대를 잇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셨고


다섯 번째에 아들을 얻으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섯 번째에도


아들을 기대했으나,


딸이었다.


남편은 종갓집 외아들이 된 것이다.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서,


둘째는 나와 연년생이고,


셋째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태어났으며,


막내는 내가 중학교 1학년 3월에 태어났다.



둘째 동생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는 원래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이 출생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둘째를 출산하면서 난산을 겪었던 엄마는 의식을 잃었고,


쌍둥이들의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다.


혼비백산이 된 젊은 아빠는 


일단 돌쟁이였던 나를 맡길 곳이 필요했고,


그렇게 나는 서울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서


외갓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둘째 동생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전무하다.



같이 살게 된 이후에도 우리 둘은 별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아침 밥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밖으로 나가서는 


저녁노을이 질 때가 돼서야 돌아왔다.


둘째는 동네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낯선 환경에 친구가 없었다.


대신 책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내 주변으로 책을 성처럼 쌓아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이 책, 저 책의 이야기 속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외롭지 않았다.


그러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에 친구들도 생기고,


절친도 생겼기에 더더욱 동생과는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렇듯 나와는 특별한 공감대를 쌓지 못한 둘째에게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사소한 말 한마디였다.



내가 돌쟁이부터 7살이 될 때까지 살게 된 곳은


전라도의 깊은 산골이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심하게 썼을 것이 분명하고,


어린 나는 말을 사투리로 배웠을 것이다.


그러다 7살이 되어 서울에 왔다고


갑자기 내가 서울말을 썼을 리는 없다.


동생은 나의 사투리가 너무나 신기하고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나 보다.



"언니는 영어도 잘하네?"


"???..."



나는 영어가 뭔지도 모르는 촌 무지렁이였다.


나는 동생에게 우스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잘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그 "영어"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내가 쓰는 사투리와 비슷한 그 무엇???...



그렇게 "영어"의 실체에 의문을 갖고 있던 어느 날,


그날따라 TV 틀어놓은 소리에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TV 속에는 한국사람과 미국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미국 사람이 뭐라 뭐라 하면 한국사람이 설명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미국 사람이 뭐라 뭐라 하는 것을 영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 저것이 "영어"구나.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그 당시(70년대 후반)에는


두 경쟁 방송국에서(TBC와 MBC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쪽에서는 '정철 영어회화'가


다른 쪽에서는 '민병철 영어회화'가


아침 6시마다 방영되었다(순전히 나의 기억에 의존한 내용이다).



'동생은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니


아침마다 저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겠군!'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20분간 방영되는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매일 시청했다.


내가 정철 아저씨 프로그램을 보았는지,


민병철 아저씨 프로그램을 보았는지,


아니면 두 개를 랜덤으로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영어 독학을 시작한 계기는


순전히 둘째의 그 말 한마디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 당시는 중학교 1학년 들어가서야


처음 알파벳을 배우던 시절이므로,


선행도 매우 빠른 선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영어는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었으며,


대학도 영어교육과로 진학했다.


지난 약 25년여 동안 나의 밥벌이는


영어를 통해서였으니, 


그야말로 둘째 동생이 


나의 진로를 정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 한마디의 힘이란...














매거진의 이전글 외할아버지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