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회피자의 선택, 귀국
실습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단체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개개인이 시티에 살 집은 물론이거니와, 일자리까지 찾아야 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불꽃 튀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 지긋지긋한 단어가 또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는 떼거지로 몰려 시드니에 집 구하는 홈페이지란 홈페이지는 모두 다 뒤졌다.
주어진 시간과 공급되는 집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인원이 넘치니, 선착순으로 좋은 집을 선택할 수 있었고 한 발짝 늦은 사람들은 비슷한 금액 대의 더럽고 비좁은 집을 택해야만 했다.
값싼 한인 쉐어하우스는 (모든 쉐어하우스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한 방에 4명, 거실에 5명 이런 식으로 한 집을 빈 공간 없이 사람으로 꽉꽉 채웠다.
일자리 경쟁은 또 어떻고..
원장 부부의 거만한 태도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 보였다.
시티의 한식당 알바는 시급이 8불이다.
그러니 본인들은(12불) 아주 잘 쳐주는 것이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식당일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식당 일과 같다.
한국 사장 밑에서 한국인들과 한국말로 일하며 한국 음식을 하고, 서빙을 하며 (대부분) 한국 손님들을 받는다. 다른 점은 장소가 호주라는 것뿐.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호주에 영어를 배우러 가서는 영어를 잘 못하니 한식당에 취직을 하게 된다. 시급이 적은 대신 일하는 시간을 많이 주니 죽어라 일만 하게 되고,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결국 포기하고 일찍 귀국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남들과 같은 길은 가고 싶지 않았다.
실습이 끝난 후, 때 마침 크리스마스 겸 신년으로 인해 2~3주라는 긴 휴가가 생겼고, 나는 이 기회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난 4개월간 그리웠던 가족, 친구들과 소주, 한식 마음껏 먹고 즐기며
호주에 남은 이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힘들게 보낸 이 시간들을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마냥 탱자 탱자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 목표는 오페어가 되는 것이었다. 한인 사이트는 다 집어치우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파기로 했다.
오페어(프랑스어: au pair, 동등하게)는 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고, 자유시간에는 어학공부를 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일종의 문화교류 프로그램이다. 워킹홀리데이(working holiday)나 기존의 유모(Nanny)와 다르게 일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고, 외국인 가정에 입주하여 현지의 문화를 체험하는 동시에 어학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문화교류 프로그램.
출처: 위키백과
Greataupair라는 홈페이지를 찾아내 가입을 한 뒤, 프로필을 열심히 작성해 올려놓았다.
설마 연락이 오겠어.. 의심 반, 희망 반으로 ..
이주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아침, 메시지가 와있었다.
두 딸을 둔 호주 가정에서 내 프로필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일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보통 오페어란 직종은 숙식이 제공되니 시급이 많이 적은 편이긴 하다. 한 주에 35시간 일을 하고 200불(시급 5.7불)을 준다고 했다. 나는 그때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영어도 잘 못하고 사실 차일드케어 자격증만 있지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시급 인상을 요구했다. 시간당 7불.
'거만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너무 과했나..?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나..'
.....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만 느껴졌고 머릿속에선 별의별 시나리오가 다 펼쳐진다.
얼마 뒤 답장이 왔다. 쿨하게 오케이!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다. 그때 당시 연휴로 인한 성수기였던 터라 시드니로 가는 비행 좌석이 완전히 매진돼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일 자리 컨택이 된 바로 그 다음날, 기적처럼 좌석 확약이 떴다. 정말 마지막에..
"내일 비행기로 도착할 거예요.."
"왓!!!!!" 가족들이 깜짝 놀랬다.
하지만 나를 반겨주며 시드니 공항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모두가 바삐 움직일 때 잠시 멈추고 남들과 전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 덕에 경쟁하나 없이 살 집(개인실)과 일자리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원하던 호주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일석 삼조!
뭐 사실 미래는 늘 불확실하기에,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은 도박과도 같다.
분명한 것은 나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피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고 그것을 찾아헤맸다.
4개월만에 허무하게 종료될 뻔한 외국살이가 한국돌아온지 2주만에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