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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Dec 15. 2023

멍게 상사와 일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사와 함께 있나요?

스펀지밥에게는 집게 사장이 있고 나에게는 멍게 상사가 있다. 멍게를 닮아 멍게 상사냐고? 음, 그러고 보니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진짜 의미는 '멍청하고 게으른' 상사이다. 예전에 잠시 유행했던 것 중 상사&부하 궁합표가 있다. 그 표는 4가지로 직장인 유형을 나눈다. 멍부, 똑부, 멍게, 똑게. 이 순서대로 최악의 상사이니 내가 모시는 멍게 상사는 그래도 최고 상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최고 상사라면 이 글이 시작되었을 리 없다.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가시밭길에 가깝기 때문에 이 매거진 제목이기도 한 나의 찬란한 밥벌이도 그리 순탄치 않다. 그동안 약 6년의 직장 생활 동안 7명의 조직 책임자를 모셨다. 스마트하고 합리적인 스타일부터 권위적인 마이크로 매니징 스타일까지. 7인 7색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스타일을 가진 멍게 상사가 나타났다. (이하 멍게)


먼저 멍게에 대해 알아보자. 독고다이 유아독존 스타일이라 그룹 내 공지 메신저방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다 새로 방이 만들어져 초대되면 화를 내거나 쌩 나가버린다. 이 짧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나름 확고한 신념이 있다. 즉 자존감과 자존심 둘 다 높은 유형이다. 일도 싫고 책임 지기도 싫지만 이 나이에 회사에서 한 자리는 맡아야 체면이 산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비공식 파트장'이라는 희한한 직책을 맡고 있다.


맡긴 맡았는데 그다지 업무에 열정이 없어 그에게 업무 가이드를 결코 기대해서는 안된다. 임원이나 유관 부서의 중요 메일을 파트 내 공유할 때도 메일 본문은 아주 간단하다. '참조하세요' 이것이 화두가 되고 있는 배경이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에 대한 코멘트는 없다. 취합 업무 지시를 할 때도 그냥 전달만 해서 내가 오히려 아래 달린 메일을 읽고 가이드를 세워 유관 부서에 재차 확인한다. 혹시 나도 모르는 새 내가 파트장이 된 걸까? 이렇다 보니 한 번씩 그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자리로 가는데, 그때마다 주식 애널리스트 리포트를 보고 있거나 독서를 하고 있다. 진짜 말 그대로 사무실에서 종이책을 읽고 있다.



멍게는 강약약강과 내로남불의 아이콘이다. 이 파트에 합류한 뒤 멍게가 담당하던 동남아 지역을 인계받았다. 어느 날 말레이시아 법인에서 사업 검토 요청이 왔다. 시장 Data와 경쟁 현황을 검토해 보니 안 그래도 작은 수요가 더욱 줄어들고 있었고, 법인에서 호기롭게 가져온 물량을 다 해낸다면 단숨에 Market Share 1위로 올라서는 아주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분석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 도입은 어려울 것 같다는 거절 메일을 보냈다. 이때 멍게를 참조로 넣었고 분명 메일까지 읽은 것을 확인했다. 일주일 후 영업 파트장이 다시 재검토 요청을 해왔는데 그제야 나를 불러 왜 이걸 거절했냐며 노발대발했다.


응? 말레이시아 도입은 본인부터도 약 3달 동안 거절해 온 건이다. 오고 간 메일 히스토리에도 똑똑히 남아있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으로 파트장급에서 재요청이 오자 화들짝 놀란 것이다. 무슨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거절한 것도 아니고 Data가 보여주는 팩트가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인가. 본인이 맡고 있을 때는 내내 무시하다가 내가 거절하니 발칵 뒤집어지는 이 내로남불은 또 무어란 말인가. 억울한 마음에 다른 파트원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아주 사이다를 날려주었다. '딱 봐도 본인이 일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예요. 이제 자기 일 아니니까 바뀐 거고ㅎㅎ'


으, 그가 점점 싫어질 무렵 또 사건이 터졌다. 회사 내 P라는 기준을 바꾸는 작업이 한창일 때다. 멍게가 기획팀 메일을 포워드 하며 신규 기준에 맞게 자료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했는데, 암만 메일을 읽어도 그가 말한 방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대로 작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물었더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타박했다. 아놔..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본문을 짚으며 하나하나 설명하니 그제야 이해하는 멍게 상사. 그러고선 '무슨 메일을 이렇게 이상하게 적었대?' 역시 자기 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무튼 자료 작성을 끝내니 멍게가 이전에 비고란에 적어둔 수상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이대로 보내면 혼선이 생길 것 같아 메일 본문에 비고는 A 하게 수정해야 할 것 같다는 코멘트를 남기고 직접 한번 더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또 '아우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왜 자꾸 마이너 한 걸로 그래?' 라며 화를 냈다. 후.. 그래, 어찌 되든 너 알아서 해라. 결국 멍게는 원래 비고를 수정하지 않은 채 기획팀에 회신했다.


다음 날, 그 비고 문장은 이슈가 되었다. 당연했다. 자료의 내용과 맞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노랑님, 우리 이거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멍게. 그땐 나도 참지 못하고 '아니, 제가 어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파트장님이 왜 자꾸 마이너 한 걸로 그러냐고 화내셨잖아요!'라고 받아쳤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그래? 미안해..ㅎㅎ'하는데 진짜 아오! 이걸 나쁜 사람은  아니라 해야 하는 건지 한번 더 사과를 하긴 했다. '내가 어제 좀 예민해서 그랬나 봐, 미안해' 사과 2번 해서 봐줬다 진짜.



그래,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입체적이니까. 부들부들. 다만 성격이 다혈질이고 일을 안 해서 얄미울 뿐이다. 사석에서 대화할 때 보면 잘 나가던 2030 시절을 회상하며 여전히 멋 부리기 좋아하는 평범한 아저씨다. 다만 재테크 얘기에 유독 눈에 생기가 돌뿐.


굳이 멍게의 장점을 찾자면 다른 파트장들처럼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조직 책임자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고 그에 따른 자료를 요청하는데 원체 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임원급에서 시킨 일이 아닌 이상 본인이 나서서 일을 만들지 않는다. 딱 최소한의 것만 한다. 리더가 악명 높다 보니 그 속에서 잘 견디고 적응 중인 우리의 평판이 상대적으로 올라간다. 마치 소년소녀 가장을 보는 듯한 눈빛이랄까. 결정적으로 멍게의 무논리 우기기에 대처하다 보니 더욱 철저하고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하게 되었다. 강약약강에 별 수 있나, 내가 강해지는 수밖에.


이제는 꽤나 체념했다. 그에게 업무적인 기대는 없으며 시시콜콜한 일상 대화나 주고받으며 파트원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다. 인간에게 과거나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을 뿐이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두 다리 딛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리더가 부재한 대신 그동안 내 실력을 키우면 된다. 그간 지나온 그 7인의 상사와 함께할 때도 늘 당시의 고충은 존재하였다. 단지 밝기와 깊이에 차이가 있었을 뿐 크고 작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며 난 차근차근 성장해 왔다. 이번 터널의 끝에서도 한 뼘만큼은 자라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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