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52, 회사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올해와 새해 사이 오묘한 경계 속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프랑스에서는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갈 즈음의 황혼을 이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황혼 무렵 저 멀리서 달려오는 동물이 내가 키우는 개인지, 날 해치려는 늑대인지, 정확한 분간이 어려워 생긴 말이다.
해리포터에는 9와 4분의 3 승강장이 나온다.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숨어있는 이 특별한 승강장은 현실세계와 마법세계의 경계에 있다. 호그와트로 가기 위해선 다짜고짜 꽉 막힌 벽을 향해 우다다 돌진해야 한다. 벽으로 달려가기 전 약간의 설렘과 긴장감. 용기를 내 그 벽을 넘는 순간 아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회사에도 개와 늑대의 시간 같은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다.
바로 W52, 52주 차다. 우리의 1년은 365일 그리고 52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W52는 한 해의 마지막 주를 의미한다. 보통 11월 말부터 인사 조직 개편 가십이 떠돌며 웅성대기 시작하고 인사 발표가 난 후에도 사무실 분위기는 어딘가 붕 떠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리더와 함께 내년도 장밋빛 실적 달성을 위한 멋진 청사진을 그려본다. 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이 계획이 잘 실행될지, 심지어 내년 실적이 신장할지 역신장할지 조차 알지 못한다. 그야말로 황혼의 땅거미가 내려앉은 9와 4분의 3 승강장이다.
우리의 W52는 회사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다. (허락한 거 맞겠지..?)
아무래도 휴가자가 많다 보니 메일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사무실이 조용하다. 나는 유럽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데 오늘 유럽 담당자들에게 업무 메일을 발송하니 거의 백이면 백 자동 회신이 왔다. OOO, Out of Office. 상황이 이렇다 보니 꼭 휴가를 쓰지 않아도 휴가를 쓴 듯한 기분이다. 정말 짜릿해! W52는 실적도 잠시 쉬어간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대왕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전년比'이기 때문에 실적을 영끌해서 뽑아봤자 내년의 우리가 고생할 뿐이다. 그래서 실적도 잠시만 안녕, 내년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보자며 1월을 기약한다.
일부러 이 때를 노리고 출근하는 분들도 많다. 연차 소진 없이 여유로운 사무실을 즐기는 것이다. 겸사겸사 한 해동안 감사했던 유관 부서 동료들과 얼굴 보고 마주 앉아 커피 한잔, 점심 한 끼 하면 그게 또 사람 사는 맛이다. 아쉽게도 난 이번에 이직을 한 터라 연차가 몇 개 있지 않아 부득이하게 쉬지 못한다. 그래서 그동안 바쁜 현안에 치여 완성하지 못한 Master File 작성과 묵혀둔 Guide Bible 정리를 하려 한다. 이 얼마나 고마운 시간인가.
더 바짝 웅크려야 멀리 뛸 수 있다. 괜히 공기 좋은 날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방학도 없이 열일하는 어른이들에게 W52는 한 해 회사 생활 마라톤 Finish 라인에서 맛보는 일종의 합법적 일탈이다. W52, 아주 잠깐의 웅크림이지만 이 Refresh에 힘입어 우린 또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정말로! 제발 믿어주세요! 이 순간이 제발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지만 어차피 12월 31일이 올 것을 알기에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다.
사장님, 지금 이 52주 차만큼은 조금만 봐주세요. 1월 2일부터 다시 또 열심히 달려볼게요.
그럼 이 해의 끝을 잡고 오늘도 개와 늑대의 시간 속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