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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Dec 04. 2023

어쩌면 이직이 답이 아닐 수도 있어요 (2)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온 신입사원

앞서 말했듯이 그놈이 그놈이다. 회사든, 사람이든, 이름만 바뀌었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나도 웃긴 그놈 중 한명이라 이직한 직장에서 전 직장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냐하면!



첫 회사의 울타리는 실로 막강하다.


신입사원으로 만난 그 첫 회사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났을 때 온 식구들이 달라 붙어 안정적 성장 궤도에 오를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과 똑같다. 먼저 갓 대학을 졸업한 이 중생들을 조직의 일원으로 키우기 위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존재한다. 이미 숱한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탄탄한 프로그램이다. 직무도 차근차근, 제품도 차근차근, 시스템도 차근차근. 

잘 몰라도 괜찮다. 기라성같은 선배들이 있으니 언제든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사만 잘해도 이쁨 받는 시기를 보내며 사원은 대리로 성장한다. 대리 진급까지 약 4년동안 병아리 신입사원도 수 많은 퀘스트를 수행하였다. 어디선가 '그 친구 일 좀 하던데?' 하는 칭찬이 하나둘 들리고 '에이스'라는 영광스러운 닉네임도 붙는다. 애쓰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맞춰 좋은 평판이 쌓이는 것이다.


이제 다시 야생의 경력직으로 돌아가보자. 이직하는 순간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하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차근차근이 어디 있는가. 괜히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다. 즉전감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나름 현업에서 OJT를 받겠지만 그것은 부서 바이 부서. 게다가 일주일 남짓에 불과하다. 그리고선 어련히 알아서 잘 커서 성과까지 단기간에 내주기를 바란다. 설사 부서 내 그 누구도 성과를 재촉하지 않더라도 괜히 당사자가 혼자 찔린다. 신입이 아니니까 나도 얼른 1인분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그간 왠만한 업무는 단번에 슉슉 쳐내던 나는 어디가고 실수 연발의 굼벵이가 눈 앞에 있는 것인지. 한번씩 일종의 자괴감 마저 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를 하다 부딪히는 순간을 마주한다. OMG. 전 이걸 어느 유관부서의 어느 분께 여쭤봐야 할까요.. 조직도엔 온통 처음보는 사람들뿐이다. 이 사람들과 앞으로 일도 해야 하고 내가 영 바보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까지 해야 한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이제 좀 살 것 같다. 사실 한두달까진 맘 속에 은근히 '저 입사한지 얼마 안됐는데요?'라는 뻔뻔한 태도를 품고 다녔다. 열심히 하되 모르는건 당당하게 물어보는 태도. 사실 이 전략은 괜찮았다. 이 시기에 기본적인 업무 지식을 빠르게 익혀둬야 나중에 '아직 이것도 몰라?'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괜히 가오잡고 혼자 고군분투하다 자승자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나조차도 3개월이 지나가자 슬슬 초조해졌다. 매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어쩜 이리 또 새로운 이슈가 튀어나오는 건지. 범위가 무한대인 문제은행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리필되는 느낌이었다. 질문에 앞선 망설임은 잦아진 반면 여러 유관부서는 본격적으로 날 찾기 시작했다.(당연하다. 맡은지 얼마가 됐든 담당자니까.)


그때마다 첫 회사에서 차곡 차곡 쌓아 올린 내공과 평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미숙함은 애교이고 질문은 미덕이던 그 시절. 끈끈한 유대 관계 속의 선후배가 있었고 힘들 땐 같이 울어줄 동기들이 있었다. 요즘은 전 직장 유관 부서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어쩌면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매일같이 업무로 부대꼈지만 이제는 앞으로 얼굴 한번 보기 힘들 사람들. 이런 그리움이 짙어질 때 아주 조~금 이직 괜히 했나 싶기도 하다. 워낙 정이 많은 성격인 탓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친구 사귀기 어렵듯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틈에 끼기 어렵긴 하지만, 뭐 그놈이 그놈이니까! 이 곳의 인연 또한 질기게 이어질 것을 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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