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다정함이 살아남는 사회
주말 오후 붐비는 지하철. 평일 출퇴근 시간 마냥 사람이 가득하다. 앞, 뒤, 양 옆 할 것 없이 사람이 빼곡해 휴대폰 하나 꺼내 보기도 힘들다. 인내하는 마음으로 인상을 쓴 채 그저 종착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참을 인 세 번쯤 새기고 나니 그래도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또 사람들이 워낙 많이 내리는 역이라 좁은 앞다투어 지하철 문을 향해 나아간다. 내린 후에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조금 빠른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나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인파 가운데 뻥 뚫린 구멍 하나가 생겨났다. 내 허리춤까지 올랑 말랑한 여자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바로 우뚝 걸음을 멈추고 엄마와 아이가 먼저 지나가게끔 비켜주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날 보더니 꾸벅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가벼운 목례.
그 순간 마음속에 풍선이 두둥실 부풀어 올랐다. 그 풍선에 구겨졌던 미간은 다시 살아났고 얼굴엔 미소가 은은히 퍼져나갔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따뜻한 생각과 함께.
그리고 내가 딱 저만했을 때, 엄마와 버스를 타던 때가 불현듯 기억났다. 자리가 없는 만원 버스를 탈 때면 처음 보는 할머니들이 '애기야 이리 와' 하시며 선뜻 무릎을 내어 주시곤 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한 후 폴짝 할머니 무릎에 앉아 편안하게 바깥 구경을 했다. 그 무릎으로 전해진 따뜻한 온정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요즘은 사는 것이 팍팍하다 보니 눈총이 아이들에게까지 따갑게 닿는다. 한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자극적인 엄마-아이 진상 스토리가 우후죽순 올라오기도 했었다. 물론 정말 과한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온 나라가 ‘엄마-아이’라는 한 카테고리를 하나하나 손가락질한 탓에 현실에서는 평범한 엄마-아이조차 괜히 약자가 되어 어딜 가든 맘 편히 있지 못하고 구석 한켠 겨우 자리만 잡은 채 있게 되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 에너지가 넘쳐 뛰고 싶을 때가 많고 높고 맑은 목소리가 때론 시끄러울 수 있다. 기억나지 않겠지만 우리도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린이에게 조금씩 더 다정해보는 건 어떨까. 공공장소의 평화를 뚫고 나오는 아이들 소리에 나도 한 번씩 불쑥 짜증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 한마디로 툭 털어버리려 한다. ‘애잖아’ 잠깐 뛴다고 잠깐 시끄럽다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니까.
최후의 승자는 선한 사람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 말을 굳게 믿기도 하고 꼭 이 말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기에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한 누군가가 되려고 매일 노력한다. 콜센터 상담원과 통화를 종료할 때 굳이 덧붙이는 ‘오늘 설명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날에 방문한 식당을 나서며 건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의 작지만 적극적인 움직임이 닿아 좀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