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부로 새로운 직장에 첫 출근을 했다. 나는 동종 업계로 이직했다. 빨간 피가 흐르던 몸에 파란 피를 수혈하게 된 것이다. 낯선 근무지, 처음 보는 사람들, 생소한 용어와 시스템 그리고 꽤나 다른 조직문화까지. 첫 이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색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중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A가 더 이상 내 회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동종 업계 이직이니 경쟁사에 대해 말할 일이 잦은데, 그 때마다 나도 모르게 A를 우리 회사로 칭해서 속으로 뜨끔 뜨끔 했다. 하루는 시장 데이터를 받아 시장 현황을 분석하려 하는데 아무리 피벗테이블을 돌려도 데이터가 안 나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왜이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필터를 'A'로 설정해 둔 상태였다.
초반에는 매일같이 A가 그리웠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이 곳에서도 친한 동료들이 생겼고 초반의 아련함도 많이 옅어졌지만 문득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부에 있을 땐 몰랐는데 정말 '인화'의 키워드에 맞는 사람들로 가득했었다. (물론 조금의 과거 기억 미화는 있는 것으로) 이런거 보면 대기업 인적성으로 사람 가려 뽑는거 꽤 높은 신빙성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A는 A스러운 사람들, 삼성은 삼성스러운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튼 과거 '우리 회사' A에서 X사로 불렸던 B사가 이제는 '우리 회사'다. 이 역할 스위치가 참으로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은 째깍 째깍 부지런히 흘렀고 곧 꽉 채운 입사 6개월이다. 초반에 남몰래 겪었던 인지부조화가 있었지만 참 신기한건 입사 전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내가 굉장히! 금방! 스트레스 없이! 자연스럽게! 이 조직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나를 통해 왜 기업이 경력직을 뽑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입사는 6월 1일에 했지만, 그 이후 이틀 교육 + 4일 현업 출근 + 그 이후 3주간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현업에 진정으로 출근한지는 딱 14일, 2주 밖에 안 된 시점부터 이 포인트를 슬슬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든, 업무 속도든, 아주 무서운 기세로 녹아들었기 때문인데 그래, 이건 암만 봐도 경력직의 짬바다.
뭐, 인간관계야~ 나는 타고나길 낯을 안 가리기 때문에 파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은 걱정도 안 했다. 6월 초에 4일 출근할 적에 그새 파트 회식을 했었는데 이미 그 때부터 파트장님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유대감을 차곡 차곡 쌓기 시작했다. 근데 이건 신입사원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느꼈을 때,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너스레' 이다. 신입일 땐, 그냥 바로 위 선배들도 어렵고 부장님은 더 어렵고 팀장님은 진짜 호환마마 같았다. 하지만 20살 넘게 차이나는 아저씨들과 지낸지가 어연 만 6년이다. 이들과 어떤 소재로 대화를 해야 하는지, 어떤 스탠스로 대화에 임하면 되는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경험으로 체득했다. 그리고 이걸 내가 억지로 한건 아니고 아저씨들이랑 노는게 은근 코드가 잘 맞다. 이렇게 쌓은 내공 덕분에 새 회사에서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도 거의 떨리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어른들은 너무 깍듯한 것 보다는 은근 선을 지키면서도 애처럼 먼저 다가와주는 걸 선호하는데 내가 이런 너스레를 잘 떠는 타입이다. 일할 때는 각 잡고 딱 배우다가도, 점심시간이나 티타임 때는 은근슬쩍 좋아할 만한 사적인 얘기를 흘리며 관심을 유발하고 적당한 리액션으로 이야기가 술술 나오도록 유도한다. 크... 나란 인싸.
자신감이 느껴지는 쿵푸판다, 마치 나같군
아, 사실 이렇게 너스레를 잘 떨게 된 것에는 사회생활 경험이 쌓임과 동시에 나이가 들면서 심적 여유가 늘었고 아는 것이 많아진 점도 한 몫한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 나는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눈치보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스쳐지나가면 마음이 전전긍긍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인데 그 때의 나는 온갖 촉수를 예민하게 바깥으로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다. 이게 나쁜 말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말 한마디와 일거수 일투족에 상처받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더 많이 만나게 될 사람들은 이미 다들 어른이기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은 상태라 서로가 여유롭다. 이걸 아는 지금은 OJT를 받다가도 불쑥 궁금하게 생기면 물어보고, 유관 부서와 점심 먹는 자리에서도 농담을 던지고, 연차에 그룹장님 중식에 초대를 받으면 죄송하지만 저 그날 못 갑니다라고 편안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뉴스를 많이 보다보니 한동훈이 어떻고, 노도강 집 값이 어떻고, 공매도가 어떤지, 이런 어른들의 대화에 능숙하게 낄 수 있게 되었다. 25살의 나는 이런 얘기만 나오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담당님, 팀장님, 부장님 틈바구니에 앉아서 속으로 엑소 노래나 부르고 있었는데.. 다 컸다 다 컸어.
업무도 굉장히 빠르게 익히고 있다. 내 현재 직무는 '영업 전략'이다. 그리고 담당 지역은 Main이 유럽, Sub가 아시아, 인도다. 맨 첫 번째로 한 것이 자사의 전년 실적을 판매량과 매출액 기준으로 확인하였고, 현재 전년비/경영비/목표비 달성률을 정리하였다. 이전 직무가 상품 기획이었고 지금 직무는 영업 전략인데, 공통적인 업무 Role이 제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판매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제품 종류는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업무에 접근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먼저 라인업 익히기. 그래서 상품 기획에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Spec Master 먼저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요 구분자에 따른 경쟁사 Spec 비교 Sheet도 추가하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내 담당 지역 법인별 22년 / 23년 라인업 현황도 정리해보려고 한다. (유럽 18개국, 아시아 3개국, 인도 1개국 .. 도합 22개국... 나 할 수 있겠지?)
또한 원래도 맨날 하는 일이 시장 분석이었기에 IDC, Gfk, NPD Raw Data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전문가였다. 그렇다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Gfk에 내 나름의 구분자열을 추가해 조금 더 간단하게 데이터 분석을 하고 있다. 또한 해외영업을 하면서 Qty, RRP, D/M, G.Price, S/D, N.Price, COI, MP, Material Cost, O/H ... 늘 분석 했었기 때문에 크게 어색하지 않다. 특히 오늘은 어떤 Low-end 라인업 모델의 COI 오류를 잡아내었다. RRP를 보았는데 판가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손익이 너무 나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재료비를 분석해 대당 재료비가 매출액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오류가 있음을 캐치했다. 그렇게 사업운영팀에 문의를 넣었고 실제로 재료비를 정정해서 COI -20% 모델을 5%로 복원시켰다. 나이스.. 아직 제품의 하이어라키를 완벽하게 익힌 것은 아니라 시간은 좀 걸리지만 한계 적자 단종 대상 모델이나 비효율 모델 회신 요청 메일에 회신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아등바등 살지 말고 여유를 갖자
꼭 이런 디테일한 현업 업무가 아니더라도 시스템 접근 권한도 혼자서 척척 받았으며 결재도 망설임 없이 올리고 하다가 막히는 것이 있으면 담당자를 찾아내서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진짜 이게 경력직 짬바인가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예전에 혜수가 내가 해외영업에 있다가 상품기획 왔을 때, 왜 다들 경력직 경력직 하는지 알겠다고 했었는데 내가 직접 몸소 피부로 느끼는 중이다. 지식과 정보가 손에 착착 붙는게 느껴져서 일까? 이직하면서 너무 열심히 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욕심이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은 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