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통한 깨달음
내가 오랫동안 영어 공부에 매달려 있었을 때쯤,
외할머니와 함께 뉴스를 보게 되었다.
거기서 누군가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고,
외할머니가 물으셨다.
" 니는 저거 알아들을 수 있나?(공부를 많이 했으니 알 것이라는 기대의 눈빛으로)"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 내가 저걸 어떻게 알아들어? 어려워."
책으로만 공부했지,
직접 영어를 듣고 말하는 언어로 생각하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 책만 본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게 아니 데이, 책을 덮었을 때도 배울 수 있는 기다."
나는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책만 보고 세상을 볼 줄 모르는 나의 우둔함을 일깨워 주려고 하신 말씀인걸..
할머니와 엄마의 공통점인 거 같다
문제점을 콕 집어 지적하지 않는다.
에둘러서 표현한다.
아이가 깨달아서 알게 하도록.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공의 실마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뱉는 말들을 충분히 수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그들의 말을 흘러 듣는다.
그들이 떠난 뒤에야 그 말들을 곱씹으며 그들을 떠올린다.
지금 내가 외할머니의 말을 기억하며 외할머니를 떠올리듯..
만약 그때 외할머니가 나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충고와 가르침이라는 것은 내 안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경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긴 말보다는 짧은 말이,
구구절절 어렵게 설명해 주는 것보다 짧은 물음을 던져주는 것이,
아이가 스스로 체득하게 기다려주는 것이,
가르침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깨달은 지식은 잊히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본질을 꿰뚫는 지혜를 가지신 분이었다.
나에겐 100세 넘게 사시다가 몇 년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도 계신다.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연로한 할머니셨다.
말이 없으시며 평온하고 항상 주는 기쁨을 아시는 인자한 분이셨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항상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뭐든지 더 챙겨 보내려고 바리바리 싸줬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 많은 걸 들고 가기 힘들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는 더 주지 못해서 아쉬워하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들에게는 용돈을 주셨다.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꼬깃꼬깃 여러 번 접힌 지폐였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지폐를 받은 나는 항상 감사했다.
한편으론, 낡고 초라한 집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가 어디서 이런 돈이 나왔을까 하며,
받는 것이 좋긴 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걱정이 됐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와 아주 짧게 전화로 통화한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통화 내내 울먹거리시고 비통해하셨다.
" 아이고, 우리 손녀, 가여워서 어쩌니, 아이고 내 아들 불쌍해서 어쩌노.. 아이고 "
나는 덤덤히 말했다.
" 할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
세상 모든 것에 통달하신 듯, 말없이 묵묵히 사신 분이셨기에,
수화기 너머 느껴지는 할머니의 슬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우리 가족의 아픔을 아주 깊게 아파한 사람이었다.
오래 사시는 게 자식들에게 불편을 끼친다고 항상 미안해하신 할머니,
늘 자신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는 천성을 가지신 온화한 나의 할머니,
당신의 온화함은
땅속 씨앗이 싹을 틔우는 봄의 온기처럼 따뜻하고
꽃들을 감싸는 시원한 바람처럼 향기롭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굳건하며
겨우내 꽁꽁 언 얼음을 녹일 만큼 뜨거웠습니다.
그들에 대한 짧은 기억을 내가 추억으로 간직하고 반추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나눈 짧은 대화와 그들이 보여준 삶을 살아내는 평범한 모습에서
그들의 빛나는 가치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옆에 함께 할 때는 알 수 없었고
잃고 나서야 가치를 깨닫듯,
나는 그들을 떠나보낸 그리움 속에서 그들의 가치를 깨닫는다.
인생은 상실과 깨달음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