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
내게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의 깊은 서랍 속엔 여섯 살 때부터 쓴 크레파스와 팔레트, 초등학생 때 뜨고 남은 뜨개질 실, 다 풀지 못한 고등학교 문제집들이 있다. 적고 보니 지금의 내게 다 필요 없는 것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버릴 때만 다가오면 왜인지 영원히 내 것이어야만 할 것 같다. 그들은 내 손을 떠나가면 영영 주인이 없을 테니 말이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종 나는 정 줄 곳이 모자라 물건에게까지 이렇게 깊이 다한다는 생각을 한다. 한심한 투로 말이지.
어떤 마음들을 두고서도 같은 흐름의 반복이었다. 이제는 빛바랜 사랑, 또는 미운 마음, 아쉽고 그리운 마음들을 한번 제대로 놓아준 적 없었다. 나는 자주 떠오르는 지난 마음들로부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들을 완전히 버리질 못했다. 여전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나를 긁어내는 마음들을 끝까지 품으려 애쓴다. 아마도 나는 자주 슬프고 싶다. 그것이 좋은 습관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사랑은 일종의 책임. 나는 그것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나, 그것을 오래 간직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한 사람일 테다. 들여다보지도 않게 된 먼지 쌓이는 내 오랜 물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끔씩 찾아와 나를 슬프게 하는 마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책임은 다하기 꺼려하면서 어떤 것도 놓아주지 못하는 사랑이랄까. 나는 한참을 어리고 어리석은 사랑을 품는 거야.
나는 무엇 때문에 아무것도 놓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겐 어떤 것을 떠나보내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렵게 되었을까. 정말로 그 '어떤 것'이 내게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인지, 혹은 떠나보내는 행위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것인지 알 수조차 없게 나를 속인다.
추측건대,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싶어서 너무 많은 것들에게 마음을 나눠두는 것 같다. 또, 갑자기 찾아올 아픈 마음에 너무 크게 다치고 싶지 않아서 자주 슬프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어지러운 서랍, 어지러운 책상, 어지러운 일기. 이 모든 것이 지겨운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사실 다 버리고 싶다. 아주 텅 빈 서랍을 가지고 싶다. 아주 새하얀 마음을 가지고 싶다. 그러나 이십 년 남짓 떠나보내는 것이 쉬웠던 적이 없기에 나는 다른 수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 내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거다. 무언갈 떠나보내는 것 대신 내가 떠나가 그것들과 아주 멀어져 보는 것이다. 정말 무엇도 떼어낼 수 없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진 않은 거다. 내 물건과 의미와 사람과 사랑, 그리고 마음을 전부 떼어내서, 전부 비워내서, 그저 그렇게 지내보기. 나는 이 여정의 텅 빈 끝에서 어떤 시작을 그릴 수 있기를 고대한다.
나에게 전해. 으깨져 형체를 알 수 없게 널브러진 사랑 사이에서 진정 빛나는 조각을 발견하는 여행이 되길 바라. 그 순간들을 담아내는 여행이 되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