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ssy Aug 25. 2024

혼자 하는 여행이 필요한 이유

이호철과 성장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생 때 처음 서울에 상경했을 때는 서촌, 광화문, 을지로 이곳저곳을 혼자 쏘다니곤 했다. 돌아다니다가 기숙사에 들어오면 룸메 언니가 묻곤 했다.


“오늘은 누구랑 놀았어”

“혼자요.”


그러면 언니는 놀라면서 감탄의 한 마디를 던졌다.

“너는 참 혼자서 잘 돌아다닌다.”


언니의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이 잠깐 난다. 나는 예전에도 혼자서 참 잘 돌아다녔고, 이제 서울이 아닌 세계를 혼자서 돌아다닌다.


이번 여름에는 일본 홋카이도를 혼자서 돌아다녔다. 여름은 나에게 쥐약이라, 무조건 시원한 데를 찾다가 문득 홋카이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홋카이도는 여름에 성수기라 비행시간에 비해 비행기값이 꽤 비쌌지만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면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해서 비행기 표를 끊었다.


하코다테와 도야 호수, 그리고 삿포로를 혼자서 걸어 다녔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의 여행 속에서 나는 혼자서 잘 돌아다녔다.

마지막 날 삿포로에 있는 홋카이도 대학을 들렸다. 학생들이 테니스를 치는 모습을, 삼삼오오 모여서 무언가 행사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카페테리아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노는 때가 가장 재미있던 때가 있었고, 친구들과의 배낭여행을 꿈꿨던 때가 있었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누구랑 가냐고 물어본다. 그럼 나는 혼자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혼자 여행을 간다고 하면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혼자 여행을 하고 있냐면,

혼자 하는 여행에서 찾은 나만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작가와 작품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호철 작가의 <탈향>이라는 작품이다.

이호철 작가가 원산 중학교 3학년 생이었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 인민군이 된다. 이후 짧은 국군 포로 생활을 거쳐 가족의 도움으로 홀로 월남하게 된다. 혈혈단신으로 부산에 남겨진 그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로 어떤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실향민으로서의 느꼈던 감정을 <탈향>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탈향>에는 어린 나이에 실향민이 된 네 명의 소년이 등장한다. 주인공 ‘나’와 광석, 두찬, 하원은 같은 동네 출신으로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월남을 하게 된다. 이들은 배 위에서 서로를 만나 친구가 되고, 부산에 도착하여 함께 화찻간 생활을 하며 지낸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공동체 의식,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그들은 하나로 끈끈하게 묶어주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감정을 공유한다.

“이제 우리 넷이 떨어지는 날은 죽는 날이다”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은 실향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실향민’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덫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아득해져 갔다. 네 사람은 서로 떨어져야만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와해되지 못한다. 그러다 화차 사고로 광석이 죽고 두찬은 공동체를 떠난다.

이후에도 ‘나’와 넷 중 가장 어린 하원은 여전히 함께였다. 하원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있었고, 여전히 고향의 ‘눈’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제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며, 실향민으로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남한의 현실에 뿌리내려야 함을 인식한다. 그래서 하원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나’는 ‘실향민’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던 공동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탈향’을 향해 나아간다.


<탈향>과 혼자 하는 여행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 <탈향> 속 ‘나’의 여정을 가볍게 생각하여 혼자 하는 여행과 연관지은 것이 아니다. ‘나’의 여정은 당연히 목적도, 그리고 배경도, 그리고 그 여정이 가지는 무게감도 내가 하는 여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탈향> 속 ‘나’는 공동체를 벗어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간 것처럼 나 또한 혼자 하는 여행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간다.


들뢰즈는 무관계성이 존재의 자율성을 기능하게 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누군가 함께 있을 때 공통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같은 대학, 같은 직장, 같은 취향, 같은 생각. 여행도 마찬가지다. 같은 관광지, 같은 음식, 같은 사진.  어쨌든 일행이 있을 때 우리는 일행과 공통점을 찾고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다. 일행과 같은 정체성을 찾게 된다. 나에게 여행은 같음을 찾는 곳이 아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곳이다. 무관계성 속에서 나의 자율성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완전히 새로운 언어 속에서 내가 가진 언어의 문법에서 벗어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마주하고 나의 생각을 넓히는 게 여행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일행과 함께하는 여행보다 혼자 하는 여행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나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여행지를 가고, 새로운 그림을 보고,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새로움 속에서 나의 선호를 찬찬히 살피고, 나에 대해 새롭게 알아간다. 그 누구도 나의 선호와 독특한 생각들에 관여하지 않는 오로지 나의 시간이다. 오래되고 고정되어 있는 생각들을 고치고 유연하게 내 생각의 범위를 넓혀간다. 기차를 놓치고 길을 잃고 실수해도 눈치 볼 사람이 없다. 많은 실수를 해도 괜찮은 시간이다. 나 스스로 나를 허용하고 나에게 자비로운 시간이 혼자 여행하는 동안 생겨난다. 어떠한 이항대립도 아닌 새로운 회색지대의 나를 찾아간다. 많은 것을 경험하며 생각의 충돌과 연결이 자연스러워지고 상상하고. 그리고 제3항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나에게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이 나에게 중요하다. 내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니까.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우리’라는 틀 안에 묶여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외로움을 잊으려 하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렵더라도 홀로를 선택한 <탈향>의 ‘나’처럼 새로운 발걸음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혼자 여행 마니아가 장담하건대,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문헌

이호철, <탈향>, <<한국소설문학대계. 39 : 소시민 외>>, 동아출판사, 1995.

전소영, <타자와 환대, 이호철 소설의 한 원영>, 현대소설 연구,  no. 77, 2020.

최상경, <이호철 소설 연구 : 50~60년대 소설에 나타난 주제 및 기법의 변모양상을 중심으로>, 성균관 대학교 일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입문>, arte, 20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