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오늘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참 적성에 맞지 않게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천성이 예민한 나는 특히 청력이 발달했다. 중학생 때 이명이 생겨서 청력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청력이 평균 이상으로 발달했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예민한 귀를 가진 내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떠드는 것에서 그치면 다행이다. 아이들이 하는 욕설을 듣는 것만큼 고역인 게 없다. 조용하게 말한다고 해도 욕에 들어있는 쌍자음은 귀에 띄는 것이라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계속 듣게 된다.
이런 내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냥 이 일이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 읽는 것을 좋아하고,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주 어린 시절 처음 한글을 배우고 기역니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간판을 그렇게 읽고 다녔다고 한다. 그 습관은 계속 이어져서 이십 대 초반 나의 주사는 숙취해소제 뒤에 적힌 영양성분표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읽는 것은 자연스럽게 쓰는 것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매해 다양한 백일장 대회를 나갔고 최우수상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입선으로 문화상품권을 받으면 기뻐하는 아이였다.
중학생 때 나는 자연스럽게 문예창작과를 떠올렸다. 쓰는 행위를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예술을 좋아했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고, 조용히, 혼자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엄마한테 말했을 때 엄마가 말했다.
“그 일은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야.” 모든 작가들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예민한 성정 덕분에 불안도도 높은 아이였다. 엄마 말대로, 불안한 내 성격에는 작가라는 직업이 딱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는 대신, 조용히 노트에 함수 그래프를 그렸다. 쏟아낼 수 없는 말들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그쯤은 숫자로 지워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는 이곳에 와 있다. 현실과 이상이 적당히 타협한 이 일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내 생각을 지워낸 머릿속은 공허했고, 마음은 병들었다. 일은 재미가 없었고, 나는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매번 나를 지키기 위해 내 행동과 내 언행을 검열해야만 했다. 일을 하러 가는 게 싫어서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을 갔다 집에 돌아오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스마트폰만 봤다. 나보다 사회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다. “일이 재미가 없고 질리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요?” 다들 그렇게 말했다. 원래 그렇게 사는 거라고. 원래 다 포기하고, 그렇게, 쉬는 날을 기다리고,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보면서 사는 거라고. 누가 일을 재미있게 하냐고,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면 좋겠지만 나는 그런 인간형은 되지 못했다. 머리가 커진 나는 ‘반항하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공허한 시간을 보내던 때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 한 아이가 하는 혐오발언을 듣고 내가 아이를 지적했다. 아이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쌍시옷이 들어간 년이라고 칭하면서 공개적 공간에서 나를 욕했다. 나는 뒤늦게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사안조사를 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들 그랬다. 나의 동료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다 그런 거야. 통과의례 같은 거야. 네가 참아야지. 이게 무슨 별 일이라고. 나도 욕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쩌고 저쩌고. 아이의 잘못이 아니면, 내 예민한 귀가 문제였을까. 내가 문제를 만든 것 같아서 나 스스로를 자책했다. 며칠은 직장에서 울음을 참을 수 없어서 화장실에서 조용히 울었다. 그러다가 이 일에 완전히 질려버려서 다른 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돈도 많이 벌고, 나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가질 거야. 퇴근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곧장 이동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네가 지금 바꾸려는 직업. 그거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거야? 돈과 명예를 가지면 너 행복해질 수 있어?
아니었다. 나에게 돈과 명예는 수단일 뿐,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문예창작과를 꿈꿨고, 소설을 좋아해서 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나를 눈여겨보시던 사서 선생님께서는 내 꿈을 듣고는 글을 써볼 것을 추천하셨다. 학교 수업 들으랴, 학원 가랴 바쁜 와중에도 수필을 한 편 썼다. 지금처럼 조용한 곳에 앉아서 키보드와 디스플레이 하나만 두고 주르륵 내 머릿속에 있는 활자들을 나열했다. 그때 처음으로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시간 가는 것도 잊고 글을 썼다. 눈 깜짝할 새 하나의 글이 완성되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좋아하고 몰입하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대견하다. 선생님은 나처럼 글을 쓴 아이들의 글을 모았고, 이 년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출판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책은 내 책장 한편에 꽂혀있다.
나는 나의 경험과 내 감을 믿기로 했다. 이제 숫자가 아닌 반항들로 새겨진 글들, 활자들 이걸 다 쏟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 글을 쓴 이후부터 수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참 신기하게 그때처럼 글을 쓰는 시간은 온전한 몰입의 시간이 된다. 하나의 글을 쓰면 머릿속이 상쾌해진 기분이 든다. 생각이라는 구겨진 옷감들을 풀을 먹여 잘 빳빳하게 다려서 하나하나 섬세하게 직조해서 독자에게 온전한 옷으로 입히는 기분. 뿌듯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다. 하고 싶었던 말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내렸다. 나는 아직도 겁이 많고 소심해서 따박따박 들어오는 작고 소중한 월급을 포기하지 못한다. 재미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퇴근하고 나서는 재미있는 글쓰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걸로 일단은 으르렁거리는 내 반항을 잠재우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회의 틀을 참 잘 따라온 모범생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그 좁은 길을 참 열심히 열심히 따라왔다. 대학교, 시험, 직장. 그 틀에 나를 딱 맞추었다. 나 자신을 깎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무거우면 내게 소중한 것들도 다 내다 버렸다. 나는 그 틀을 따라 걸어야 하니까, 그 틀이 맞다고 배우고, 그 틀을 향해 따라가면 결국 목적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답하기 어렵다.
나는 아이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A는 B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했는데, 왜 B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니?”
그러면 백이면 백, 다 이렇게 답한다.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요.”
다시 한번 아이에게 묻는다.
“돈을 많이 벌면 어떨 것 같아?”
또다시 비슷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행복할 것 같아요.”
내가 따라온 틀은 내가 원하는 것마저 정해두었다. 너는 행복을 원하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돈, 돈, 돈. 그 돈을 얻으려고 살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들을 다 까먹고 잃어버린다. 돈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라고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행복해지는 방법에는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고. 돈을 벌어서 좋은 차, 좋은 집을 사는 것도 행복일 수 있지만 친구들이랑 소소하게 떡볶이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고. 나와 다르게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합리한 틀을 빨리 깨닫고 이 틀에 반항했으면 한다. 이 틀을 깨고 더 많은 길들을 만들기를. 오솔길로, 바닷길로, 산길로,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갔으면 좋겠다.
내 주변에도 일찍이 이 틀을 깨고 자신만의 길을 건너가는 친구들이 있었다. 얼마나 용기 있고 대단한지 모른다. 그 친구들은 틀이 유연하게 수정되길 사회에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틀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은 친구들이다. 틀 안에 갇힌 눈먼 개구리들이 “야, 넌 이 틀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다른 곳에 가서 성공하겠냐?”라고 비아냥대는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니들이 말하는 성공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아”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자유를 찾아간 가장 반짝이는 눈을 가진 친구들이다. 힘들다고 한다. 다른 언어를 듣고, 다른 인종들과 섞이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대답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너는 ‘존재하는 인간’이잖아. 너는 너 자신을 아는 인간이고, 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결국은 너만의 목표를 세울 사람이잖아.
나는 아직도 타협 중이다. 우물 안 개구리이긴 하지만, 이 우물이 틀리다는 건 아는 개구리. 억울한 것도 많고 답답한 것도 많다. 하지만 나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우물을 바꾸고 싶어 하는 개구리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외치고 외치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우물에서 개울 정도로 나와서 좀 폭넓게 다른 개구리들을 인정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