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보는 눈, 반 고흐
오늘은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여러 날 여러 시간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을 깎고 다듬으면서 만든 태도이다.
어린 날의 나는 누구보다 경쟁심이 치열했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나야만 마음이 놓이는 사람. 항상 칭찬이 필요했던 아이였다. 인정받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나는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은 나를 불안감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내 삶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삶과 다른 게 없었다. 외로웠다.
이런 내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여행과 책에 있다. 여행을 가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책을 읽으며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 삶을 보는 태도를 바꿔준 책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과 이 책을 읽은 이후 달라진 나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책의 김원영 작가는 골형성부전증으로 인한 선천적 장애인이자 변호사로, 우리가 흔히 ‘잘못된 삶’이라고 쉽게 치부하는 삶들에 대한 변론을 펼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는 우리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질문을 던진다.
외모? 목소리? 아니면 직업? 어떤 기준으로 우리는 누군가가 매력 있다고 평가를 하는 걸까? 신체적 요건이 모든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긴 시간에 걸쳐 한 사람을 담는 ‘초상화 그리기’에 답이 있다고.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 질 녘 그림자가 진 옆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 때면 쭉 펴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 올릴 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할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다른 사람이 나의 초상화를 그리듯이 나도 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구절을 읽은 이후로는 한 사람의 삶을 쉽게 평가하지 않으려 했다. 피부의 결보다 주름의 결을 보고, 눈의 모양새보다는 눈동자의 반짝임을 봤다. 그 사람의 연륜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작은 붓질이 되어 어느새 마음의 캔버스를 뒤덮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작은 아름다움 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화려한 건물의 유리 장식보다 여름의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계절이 변화하는 자연의 생동감을 느끼게 되었다.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순간순간 그림을 그려가는 재미를 얻게 되었다. 윤회는 끝도 없다지만, 마지막 윤회를 하는 사람처럼 이 삶의 순간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느끼게 되었다.
내 이름에는 아름다울 ‘미’ 자가 들어가는데, 이런 아름다움을 보라고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을 한다. 사실 이런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주변에 많지는 않다. 그래서 작은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았던 화가의 작품을 찾아보게 되었다. 고된 삶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놓지 않았던, 반 고흐.
그저 자신이 머무르는 방을 그렸을 뿐인데 고흐의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이 묻어나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섬세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 다른 고흐의 작품. 매춘부를 그린 <슬픔>이다. 그는 불쌍한 매춘부를 연민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그의 가족은 매춘부와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의 그림에는 연민을 담은 시선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그녀의 고통을 그리려는, 그녀의 삶을 그림으로 풀어내려는 노력이 보인다.
반 고흐는 생전에 무명작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탁월한 눈과 마음을 가져서 많은 사람의 초상을 그려낸 반 고흐였지만, 정작 그의 초상을 그려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 고흐는 스스로 자신의 초상을 그려냈다. 자신의 삶과 이야기, 자신의 표정을, 자신의 눈을 캔버스에 그렸다.
나의 글도 그러한 시도다. 나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의 초상화를 그리자는 시도. 나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려는 시도. 내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시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 초상화를 그려줄 붓을 건네는 시도.
브런치를 쓰면서 신기한 것은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는지 사실 알지 못한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에 공감을 해주고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다. 이미 세 번의 붓칠을 했고 이번이 네 번의 붓칠이다. 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여러분께 감사를 보낸다. 이 연재가 끝날 때쯤에는 캔버스가 내가 보는 세상처럼 찬란한 색채들로 반짝이길 바란다.
참고 문헌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