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과 기억
요즘은 운동으로 수영을 한다. 달리기, 테니스, 필라테스, 헬스 돌고 돌다가 결국 다시 수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영장 가면 고인물들의 텃세가 있다는 말에 좀 겁을 먹었는데, 막상 가니 텃세도 없었고 나의 형편없는 수영 실력에 참견하는 사람도 없었다.
수영을 하면 오롯이 혼자서, 나의 호흡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팔을 휘적휘적거리면서 다리를 첨벙거리며 한 레인의 끝을 향해 호흡을 내뱉는 것. 그것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오늘은 배영을 도전해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자유형을 할 때는 몸이 물에 잘 뜨는 것 같은데 배영을 할 때는 몸이 물에 잘 뜨지 않아서 계속 꼬르륵 물을 마셨다.
수영장 한 구석에서 물에 뜨는 연습을 했다. 뭐가 그렇게 몸이 무거운지 계속 가라앉기만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몸이 물에 뜨는 원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람 인체의 밀도는 물의 밀도보다 낮고 그로 인해 중력의 크기보다 부력의 크기가 커서 몸이 뜬다고 한다. 오늘의 나의 생각의 밀도가 높아서, 그래서 배영을 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수영을 하면 수영을 처음 배웠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열일곱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수영을 처음 배웠다. 수영장이 있는 학교라니, 뭔가 비싼 사립학교 같아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모두에게 친숙했던 학교이고, 무엇보다 학교의 부지가 넓어서 지역 주민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수영장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지역 주민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고, 생존 수영 교육이 중시되던 때라 학교에 수영장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수영 수업은 학생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다. 수영복으로 환복 하고, 샤워하고, 물에 들어가야 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맨몸을 보여줘야 하고. 바쁜 고등학생들에게 수영 수업은 번거롭고 귀찮은 수업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고등학교 진학 때 수영 수업이 있는 우리 학교를 후순위로 지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수영 수업은 듣기 싫다고, 제발 이 학교가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다행이게도) 이 학교에 뺑뺑이 돌려서 오게 되었다.
귀찮고 짜증 난다고 구시렁대면서 처음 들어간 수영장 물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친구들과 물놀이를 한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나의 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건 부력인지, 즐거움인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수영 수업이 재밌어졌다. 먼저 배운 것은 호흡. 우리는 아직 어렸지만 그보다 더 어렸던 신생아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태아 때인가? 태어나기 전 양수 안에서 일어났던 호흡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는데, 우리는 이제 물 밖에서 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며 물속에서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안온했던 뱃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물속에 머리를 넣고 ‘음-’ 소리를 내고 물 밖에서 ‘파-’ 소리를 냈다. ‘생’의 전과 ‘생‘의 후가 교차되는 호흡을 내뱉었다.
호흡을 배우고, 팔을 휘적거리는 것을 배우고, 킥판에 기대에 물속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킥판을 빠르게 졸업했고, 우리는 수영 수행평가를 준비하며 이제 제법 태가 나는 자유형을 선보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수영은 무섭지 않았고 몸은 물 위에서 잘 떴다. 수행평가의 결과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도 물에 빠졌을 때 생존은 가능한 정도의 수영 실력을 가졌다. 아직도 친구들과 서로 수영을 가르쳐주던 게 생각이 난다. 물에서 너무 잘 뜨는 아이도 있었고, 물에서 잘 뜨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가르쳐주면서 물 위에서 적당히 뜨며 나아가는 법을 배웠었다. 쉬는 시간엔 손으로 물총을 뿌리기도 하고, 물아래에서 수영복을 끌어당겨 놀라게 하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런 장난들에 물을 헛삼키면서도 신나고 재밌었다. 교실에서는 작았던 웃음소리가 아이들이 만드는 물결을 타고 부딪히며 공명하는 시간들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다 같이 매점 앞에 있는 통돌이에 가서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제일 먼저 통돌이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는, 빨리 수영복을 넣고 매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 몸은 노곤하고 배는 허기로 가득 차서 매점의 납작한 햄버거를 꼭 먹어주어야 했다. 통돌이에 수영복을 넣고, 통돌이를 돌리고, 매점에서 햄버거를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뜨거운 햄버거를 한 입하며 교실로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수영 시간이 끝난 뒤에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들은 매번 늦는 우리들을 보며 한숨을 쉬시면서도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졸린 눈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우리들을 봐주시곤 했다. 수영 수업이 끝난 뒤에 나는 국어 수업이 있었던 것 같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면, 선생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눈을 감았다.
지금도 나는 자유형밖에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멋있게 접영도 하고, 배영도 하는데. 손이 느리고 게을러서 수영 강좌 수강신청도 하지 못한다. 수영장 가기 전에 유튜브라도 보면서 배워야 할 판이다. 요즘은 수영을 잘하려고 수영장에 가기보다는 그냥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수영장에 간다. 그때 같이 웃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경쟁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길었다. 우리는 서로를 시기해야만 하고, 서로의 좋은 부분보다 나쁜 부분들을 먼저 봤다. 질기게 남을 괴롭히는 아이도 있었고, 지겹도록 괴롭힘 당하던 아이도 있었고, 무력하게 바라보는 아이도 있었다. 그 속에 있는 게 너무나 괴로워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고등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거의 연락을 끊었다. 간간히 안부인사를 건네는 친구들만 있을 뿐이다. 분명 돌아가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수영 수업의 기억은 아직도 오랫동안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냉랭했던 교실의 공기와 다르게, 수영장에서는 누군가가 물결의 흐름을 만들면 그대로 나에게 닿아 우리가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물결을 만들어낸다.
신기한 일이다. 몇 년 동안 수영을 하지 못했는데, 물속에서 몸이 뜨고 내 몸이 유일하게 배운 영법을 기억하는 게. 내 잃어버린 친구들은 지금 어떤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물결을 만들다 더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유형의 기억을 꺼내 살아남을 것이다. 혹시 당신도 이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처럼 손을 흔들어주기를. 공기의 파동이 여기까지 닿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