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ssy Sep 29. 2024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에에올 그리고 선업튀

나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면서 살았다. ‘내가 과거에 ~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현재의 내가 참 초라하게 느껴진다. 너무 많은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소처럼 곱씹는다. 이미 일어난 일을 식도로 역류시키고 입에서 곱씹고 다시 곱씹고 그러다 보면 후회와 우울만 남는다. 그런 식으로 나는 몇 번이고 과거를 돌이키고 후회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산다면 어땠을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나의 모습을 보고, 그중에서 나를 선택할 수 있으면 어떨까? 그런데 평행 세계의 나는 다 잘 나가는데 이 세계의 내가 가장 최악의 나이면 어떻게 할까? 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에블린은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딸과의 관계는 최악이고, 남편은 에블린과의 이혼을 준비한다. 그러다 우연하게 에블린은 지구를 구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이때 에블린은 수많은 평행세계 속 에블린을 만나고 다른 에블린의 능력을 빌려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 에블린은 무술로 유명한 여배우가 되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그 많은 평행세계 중 가장 최악의 에블린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에블린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다른 평행세계의 나로 살며 돈도, 명예도 누리고 싶지 않을까?


 에블린은 최악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최악의 모습으로 다시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최악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곁을 지킨 남편과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쌓아온 ‘이야기’들을 포기할 수 없다.

 

이 이야기와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한 유명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는 올해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솔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선재를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타임리프를 감행한다. 타임리프를 하기 전 솔은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를 이용해야만 했는데, 그녀가 원하는 회사는 휠체어를 사용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회사의 공간이 베리어프리존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취업이 좌절된다.

 

몇 번의 타임리프 후에 솔은 다리를 다치지 않고 비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회사의 계단을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올라간다. 타임리프 전 솔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취직에서 좌절되었지만, 타임리프 후 솔은 비장애인으로 당당하게 취업하여 본인의 꿈도 이루고 사랑도 이룬다. 이 장면을 보고 난 이후로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이 장면을 연출한 사람은 솔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타임리프 이전의 솔의 ‘저자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꽝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캐릭터’로만 사용하려는 의도가 보여서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나간다. 즉, 모든 사람은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누구나 삶의 저자가 될 수 있다.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질서가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작가, 저자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의 인생을 멋대로 편집한다는 건, 그건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다들 인생에 말을 얹고는 한다. 네가 결혼을 했으면, 네가 약대를 갔으면, 네가 의대를 갔으면, 네가 ~을 했으면. ~을 했으면 하는 삶은 다른 평행세계의 내가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의 이야기는 내가 모른다. 내가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현재의 내 삶보다 소중하지 않고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삶도 역시 아니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네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장애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물론 삶의 난이도는 쉬워졌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지금만큼의 많은 깨달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과거가 달라졌으면 하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을 싫어하기를 그렇게 바라는가? 그리고 나의 삶이 완전무결한 완소 퍼펙트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항상 후회 없는 선택을 했는가? 이런 말을 하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황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방의 펀치를 날려주고 싶다. 당신은 지금 저의 저자성을 무시하고 있고, 이것은 저의 존엄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 주장의 근거는 헌법에 있어요! 법까지 들먹이며 말을 하면 다들 더욱 당황하지 않을까?

 

내 삶을 바꾸고자 반추하는 나의 시도는 나를 싫어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는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과거는 이제 저장된 이야기이고, 우리에게는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 ‘지금, 여기’를 바라보자. 그리고 에블린처럼, 지금까지 쌓아온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후련한 온점을 찍기 위해 남은 미래를 즐겁게 써 내려가자. 얼마나 재미있는가? 마감기한도 알 수 없고, 결말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물론, 수정은 어렵겠지만 이야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만큼의 쓸 수 있는 빈 페이지도 많이 남지 않았는가? 나는 최선을 다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남은 페이지의 이야기를 한 자 한 자 섬세하게 새기고 싶은 마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