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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sy Oct 13.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며칠 전에 한강 작가님께서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기뻤는데 이 기쁨을 같이 나눌 만한 사람이 없어서 단박에 슬퍼졌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실용적인 책을 찾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 같다고 최근에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느꼈다.

 그런 와중에 한국어로 글을 쓰고, 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다니. 독서 불모지에서 초인이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요즘 쓰는 일을 하는 것에 많이 무기력해져 있었다. 쓰고 싶은 내용은 많았는데 이걸 써서 누가 볼까, 나를 알아주기나 할까 그런 생각에 모니터를 켜고 끄기만 여러 번. 단 한 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쓰기에 의욕을 잃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해도 사람들은 쉽게 그 내용을 곡해하고, 유해하다고 치부하고, 옳은 것에 ‘불량’이라는 라벨링이 붙은 세상에 무언가 외칠 힘이 없었다.

 한강 작가님의 수상은, 쓰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위안과 같았다. 올바른 쓰기는 결국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지금껏 나를 쓰게 만들어준 한국의 여성 작가님들의 글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지금껏 내가 생각하는 쓰기를 정립하게 해 준 글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퍼졌으면 하는 글들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른 아닌 것이다.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현실에서 얻은 감동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 속 마지막 작가의 글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작가는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위해 인생의 이면을 들어다 보게 된다. 인생의 모순을 직시하게 된다. 그렇게 전달된 이야기는 독자에게 삶의 또 다른 지평을 열게 해 준다. 이야기는 전달되고 전달되고 전달되어 결국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많은 독자들이 공유하게 된다. 종이 안에만 머무른다고 생각했던 활자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열쇠’로 작용할 수 있다.


작가는 눈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모순과 역설을 발견하는 예리한 눈. 내가 작가가 되기 위해 눈이 필요함을 알게 해 준 글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사건을 마주하면 오랫동안 그 사건을 곱씹어보곤 한다. 사건의 이면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이런 생각들은 나중에 글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대화틈에 끼어들기도 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하면, 가끔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가 필요해요 “라고 말하면 ”a를 하기 위한 돈은 있어? “라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그럴 때마다 무력해지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생각들이 필요한 때가 오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한다. 이 쓸데없는 생각들이 부딪히고 마찰하면서 부디 나의 예리한 눈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스파크가 튄다면 더더욱 좋겠지. 그때 내 생각과 글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별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지면에서 다루어야 하는지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때 당신은 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은 울면서 글을 썼다. 마음이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그때 알았다.


사건의 이면을 보면, 그럼 어떻게 써야 할까. 최은영 작가님의 <몫>을 보면서 어떤 쓰기가 필요한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가끔씩 정신 나간 소리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정신 나간 소리들로 인해서 죽어가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무너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전쟁 속에서 폭파된 병원의 건물 잔해를 볼 때마다, ‘나 지금 무슨 소리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울컥울컥 말들이 입에서 맴돌 때가 있다. 그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최은영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알았다.


쓰지 못한 채로 묻힌 일들이 너무나 많다. 많은 일들이 흔적도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냥 흘러간 일들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죄책감을 가졌다. 무언가 쓰기라도 할걸. 나는 쓰기의 힘을 믿지 못한 채로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제로 제출하기 위한 글을 썼던 대학생. 회사에 제출하기 위한 보고서를 쓰는 현재. 집에 오면 자연스레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거기 있는 혐오의 글들. 익명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공격하는 글들.


장애인이면서도 공격당하는 장애인을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 여성이면서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격당하고 죽어간 그녀를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나를 더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몫>을 보면서 깨달았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글을 쓰는 건 항상 벽에 부딪히는 일과 같다. 내 감정과 내 언어와 내 생각의 한계를 깨야만 했다. 고단한 과정이지만, 쓰고 나서야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다.

내 주변에 내가 기억하고 세상이 기억해야 하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그렇게라도 나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그 사람을 돕고 싶었다.

아직 내가 쓰기를 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 역시 쓰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잠시도 잠들 수 없었던, 그러나 빠져나올 수도 없었던 침대에서 마침내 내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미지의 수신인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내가 써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인생과 화해하지 않아도 몸을 일으켜 써야 한다.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글의 초반에 삶을 포기하려는 주인공의 삶에 많은 공감을 했다. 몸을 일으켜 제주로 향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내 인생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살아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나와 같이 죄책감을 가진 채로 죽어간 연약한 생명들을 꽃이 있는 밝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소년이 온다> 중에서


오늘 뉴스를 보면서 베스트셀러의 순위가 바뀐 것을 알았다. 서점에 있는 한강 작가의 책이 모두 팔려서 바로 책을 구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을 찾는 사람이 있구나. 올곧은 글을 찾는 사람이 있구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

한강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받으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는데, 작가님은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끼셨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리한 눈으로 사건을 보고, 지나가 버린 사람들, 침묵 속에 묻혀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죄책감을 느끼셨을까. 얼마나 많은 한계를 깨 가면서 이런 글을 쓰셨을까 생각한다.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렵다. 올바른 글은 쓰려면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리고 그 고통을 왜곡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글의 가치는 결국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한강 작가님의 수상을 통해서 이제야 깨달았다.



참고 문헌

양귀자, <모순>, 쓰다, 2013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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