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물음표들
많은 물음표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호의였고, 하나는 호기심이었고, 하나는 비난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상처였다. 당신은 어떤 물음표를 상대를 향해 건네고, 어떤 물음표를 받아서 지금까지 자라왔을까. 나는 오늘 나를 만든 물음표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잊지 못할 물음표가 있다.
그날은 길고 길었던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는 날이었다. 학교에서 다른 동기들이랑 헤어져서 나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나를 모두 망쳐버릴 그 물음표를 만났다.
“왜 그렇게 되었냐?”는 물음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떤 맥락도 없이 그 물음표가 화살처럼 나에게 당겨졌다. ‘그렇게’에는 많은 함의가 있었다. ‘그렇게’에는 ‘장애’가 있었고, ‘그렇게’에는 ‘다르다’라는 인식이 있었고, ‘그렇게’에는 ‘너의 장애에 대해 내가 함부로 질문해도 된다’는 그의 무례함이 있었다.
그의 질문에 지하철에 있는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는 뭐라고 했더라.
“기술이 좋아졌으니 너도 좋아질 것이다”
그의 모든 말에는 장애인은 정상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이 있었고, 정상인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차별이 있었다. 그의 물음표는 나에게 분명한 모욕이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나조차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주변인들의 시선과 침묵이 그의 물음표에 대한 동조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음 정차역에서 곧바로 내렸다. 집으로 가는 내내 울었다.
그의 물음표는, 내 모든 노력을 물거품처럼 만들었다. 나는 무너진 나의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 왔는데, 그는 그 물음표 하나로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언제나 그들이 만든 선 밖의 약자이자 이방인이며, 그 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값비싼 기술을 구매하여 나의 장애를 완전히 지워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물음표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 삶을 반추하는 일만 계속했다. 내 삶 전체가 뒤틀려버린 폐허가 되었다. 이대로 무너지는 걸 둘 수 없어서 받았던 심리 상담에서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
“제가 나아지려고 노력해도, 저는 무례한 물음표들에 계속 무너질 거예요. 그들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저를 계속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그의 질문에 이제 대답하자면,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야 하는 저자가 10대 초반에 겪은 일이다. 한여름에 저자의 동네 친구들은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기로 한다. 모두 계곡으로 향하는데 한 친구가 자기는 가지 않게 다면 저자의 집 소파에 눕는다. 저자가 친구에게 빨리 수영을 가라며 타박하자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 피부관리해야 돼”
저자는 친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짓에 숨겨진 진실한 의도 역시 알고 있었다. 저자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 아이는 서로의 진실을 철저히 공유하면서도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연기 내용을 조율하며 한 편의 무대를 연출한다.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대사와 행동에는 거짓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은 진실을 바탕으로 무대를 구축했다.
위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친구가 ‘거짓말’을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친구의 ‘존중’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친구는 저자의 상황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다. 동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계곡으로 떠날 때 저자가 겪어야 할 외로움을 생각하고, 저자를 배려해서 저자와 함께 남아있는 다른 이유를 만들었다. 저자와 친구는 서로 연기를 했지만, 이를 통해서 ‘존중’을 실천했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연기는 누군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존엄을 지키고, 누군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연기가 참 이상하게도, 약자에게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약자에게 그러하다. 약자 앞에서 연기하지 않는다. 숨김없이 시선을 쏟아내고, 물음표를 겨누고, 그리고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혐오 발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온라인 환경에서는 더더욱 심하다.
약자 앞에서 연기하지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그건 ‘솔직’한 행동이 아니고, 누군가의 존엄을 깨뜨리는 행동이라고.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할 수 없는 당신들이 ‘비정상인’이라고!
이제는 그의 물음표에 느낌표로 대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물음표를 이야기하려 한다.
“어떻게 견뎠나요?”
직장 선배님께서 나에게 여쭤보셨다. 나는 어릴 적에 일찍 가족을 잃었는데, 직장 선배님께서 부모님의 임종을 앞두고 나에게 질문하셨다. 어떻게 이별을 견뎠냐는 말에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뻔하지만 진리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 물음표는 내가 참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어린 나이에 해일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파도처럼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는데, 눈 떠 보니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모든 고통들이 전생처럼 느껴진다.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지 계속 나도 하늘에 물음표를 던졌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아서 스스로 답을 찾아 헤매었다.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성찰을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다 지나있었다.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다 자랐다. 지지대가 없으면 그냥 내가 꼿꼿하게 자라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느낌표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 약하게 휘어지는 물음표 같은 인간이 아니라, 느낌표 같은 인간으로 잘 자랐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고문헌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