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학동역에 간 적이 있다. 종종 일이 있어서 들렸던 곳인데, 일만 처리하고 가느라 동네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그냥 그날은 그 동네를 한 번 돌아보고 싶어서 학동 공원 근처 카페에 갔다가 학동 공원도 한 번 산책을 했다.
독특한 카페였다. 마치 파리에서 볼 법한 그런 앤틱 한 의자들이 카페 외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격이 사악한 커피를 팔았다. 자주 올 곳도 아니고, 온 김에 비싼 커피는 어떤 맛인지 마셔보자는 생각으로 결제를 했다.
커피는 아주 작은 잔에 담겨 있었다. 스페셜 어쩌고저쩌고 긴 이름이 붙은 그 커피는 특별한 맛도 아니었다. 다른 커피와 차별화되는 것은 가격뿐이었다. 스페셜은 가격이 스페셜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길 건너편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강아지를 안고 카페로 들어와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 이 사람들은 어떤 공간에서 살까. 마침 카페 옆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있었다. 아주 높은 담벼락을 세워놓은 아파트였다. 시시티브이도 곳곳에 설치된, 아주 삼엄한 보안이 인상적인 새 아파트.
생각을 해봤다. 내가 평생 열심히 노동을 하면 저 아파트를 살 수 있을까. 계산을 해보니 평생 돈을 쓰지 않고 모아야만 겨우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에 집 값이 오르거나 물가가 상승한다면 그 집은 ‘겨우’로도 못 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저 집은 사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들에 요즘 그런 영상들이 많이 보인다. 노력해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썸네일은 대충 다 이런 내용이다. “30대에 몇십억 매출 달성! 흙수저 탈출” 뭐 이런 내용들. 그 사람들의 하루를 돌아보면, 하루종일 정말 열심히 산다. 열심히 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잡는다. 영상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생각도 든다.
가난한 이유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인가?
발육이 좋지 못해 우리보다 작고 약하지만 그 작은 몸속에 모진 생각들만 처넣고 사는 이런 부류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남다른 노력과 자본, 경영, 경쟁, 독점을 통해 누리는 생존을 공박하고, 저희들은 무서운 독물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 간다고 단정했다. 그 중독 독물이 설혹 가난이라 하고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희의 자유의사에 따라 은강 공장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마음대로 공장 일을 놓고 떠날 수가 있었다. 공장 일을 하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그런데도 찡그린 얼굴을 펴 본 적이 없다.
-조세희,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중에서-
이 작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연작 소설 중 한 작품으로, 작품의 ‘나’는 은강그룹 회장의 아들인 경훈이다. 그리고 경훈이 이야기하는 ‘그들’은 난장이 가족으로 대표되는 가난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경훈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금수저이다. 이 금수저는 자신들의 생존은 ‘남다른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훈은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해 ‘모진 생각’을 넣고 다니는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진짜 ‘모진 생각’은 누가 하고 있는 것일까. 경훈은 공감을 상실했다. 노동자들로 인해 공장이 돌아가고, 경훈의 생활이 유지되는데 경훈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에게 연민조차 가지지 않는다. 나는 최근 가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마치 경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다, 모진 생각만 넣고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불만이 많다. 가난하면 모진 시선까지도 받아야 하는 건가.
처음 대학교에 입학하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 주렁주렁 달린 글들을 봤다. “기숙사 설립 금지, 지역 주민의 삶이 망해간다” 이런 슬로건이었다. 기숙사를 증축하는 것을 막는다는 대학 주변 주민들의 반대였다.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숙사가 많아지면, 학생들은 값이 싼 기숙사에 들어가려 하고, 주민들은 월세방 장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숙사 증축 반대로 인해 기숙사는 학생수에 비해 턱없이 방이 모자랐고, 그로 인해 기숙사는 신입생이 아닌 학생들은 거의 받아주지 못했다. 대학가 주변 월세는 월 60에 보증금 1000 정도. 5~6평짜리 방이 그 정도 가격이었다. 그냥 학교를 다니려고 하는 것뿐인데 월세에, 생활비에, 한 달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서울에 집이 있는 것 자체가 스펙이다,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주변 학원에서 강사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외도 한 적이 있었다. 내 공부도 해야 하고, 학원 아이들의 공부도 봐주어야 했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생활이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서 대학교에 왔는데, 대학교에 오니까 모든 노력을 그냥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꿈을 위해서 노력할 수 없었다.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다고 그랬는데, 가난하면 노력할 환경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온다.
가난 때문에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냥 불편한 정도를 넘어, 사회적 개체로서 ‘나’의 위신과 존재가 부정당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아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사회적 존재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욕구에 대해 둔감해진다. 흔히들 빈곤층은 왜 미래를 위해 저축하지 않고, 왜 절박한 순간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왜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배치되는 선택을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가난하다는 것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재화가 없음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고 사회적 존재가 일상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에 대처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한다. 즉, 생존 자체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합리적 판단을 하고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노력할 에너지조차 없다. 노력을 어떻게 할지 생각할 에너지조차 없다. 생존해야 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노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던져주는 질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각박해지는 걸까. 얼마나 더 많은 경훈이 생기고, 얼마나 더 많은 집주인이 생겨야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아는 걸까.
학동역 인근 아파트의 수많은 시시티브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그 많은 눈을 두었는데, ‘그들’에게는 한 번이라도 눈을 돌린 적이 있었냐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