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과사자 Aug 20. 2021

평화가 없는 평화의 계곡

콜로라도 Peaceful Valley

7월 5일엔 오후부터 밤까지 비가 왔다 갔다 했다. 돌풍도 예보되었다. 어떤 이들은 캠핑을 취소했고 어떤 이들은 예정대로 캠핑을 왔다. 우리는 꽃과 사자를 데리고 캠핑장에 나타났다.


집에서 서쪽으로 15분 가면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갔던 계곡이 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산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가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고른 캠핑장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멋진 바위 계곡을 따라가다 보니 손바닥만 한 타운이 나타났다. 모든 건물이 비현실적으로 낡고 작아서 10년 전에 갔던 강원도 정선 한 면소재지의 미국판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동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텐트 칠 일이 염려되는 와중에도 구경거리는 있었다. 산 위를 봐도 아래를 내려봐도 첩첩산중인 곳에 사람 사는 집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얼마 후 나타난 큰 도로를 달리다가 좌회전했더니 피스풀 밸리 캠핑장이 나타났다. 중간에 난 작은 길로 ATV가 지나다녀서 조금 시끄러웠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곳이었다.


피스풀 밸리 캠핑장의 아이들


이번 캠핑에서 우리의 타이밍은 정말 놀라웠다. 비가 멈춘 사이 서둘러 텐트를 세웠다. 그러다 저녁 먹는데 또 비가 왔고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가 들어가서 눕자마자 다시 폭우가 몰아쳤다.


꽃과 사자는 처음에 텐트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나비를 쫓아 숲으로 갔다. 누군가 일부러 갖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시내 위로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꽃은 조심조심 올라가더니 절반 정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갔다. 사자는 시냇물을 걸어 건넜다.


시내 건너편으로 나무가 아주 빽빽한데도 아이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넘어진 나무통을 넘고 넘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보기보다 많이 미끄러운 곳은 아니었다. ATV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들은 쓰레기차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꽃은 집에서부터 가져온 학교 가방을 메고 선두에 섰다. 말은 잘 못해도 자기가 누나니까 사자보다 앞서야 하는 꽃. 누나란 원래 그런 존재인 줄 알고 아직은 누나 따라가기를 더 좋아하는 사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열이 있는 아이들이 귀엽고 우스웠다.


텐트가 완성되자 남편도 합세해서 제대로 물 구경을 하러 갔다. 이름에 걸맞게 적당한 양의 물이 너무 큰 소리도 없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꽃은 돌다리를 수차례 건넜다. 즐거움과 자랑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아직 키가 짧은 사자는 자기 다리가 안 닿으니 포기하고 누나 잘한다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내친김에 꽃은 트레일도 좀 걸었다. 사자는 속도를 내지 못해 뒤에 있다가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둘 다 계곡 물속으로 들어갔다. 구름이 잔뜩 끼고 기온이 낮아도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몸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는 건 엄마 아빠의 책임이었다.


숲 속의 아이들


우리가 가는 캠핑장에는 늘 베어 박스가 있다. 곰이나 마운틴 라이언이 내려올 경우를 대비해 음식을 보관하는 곳인데 다행히 아직 그런 경험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몇 번이나 사슴이 내려왔다. 꽃과 사자는 밥 먹다가 사슴을 보더니 “Deer, eat!”라며 먹여주는 시늉을 했다. 인사하려고 맨발로 뛰어가기도 했다. 다음 날에도 사슴이 내려와 같이 아침을 먹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른 저녁을 먹는 동안 비바람이 불었다. 우비를 입고 있는데도 타프가 넘어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조금 전 한번 쓰러지기도 한 상태.) 캠핑장 호스트 가제보가 튼튼해 보여서 난 우리도 저런 스타일로 살 걸 그랬다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저쪽에 막 도착한 가족을 보니 우비도 입지 않고 텐트를 치고 있었다. 이 날씨에 민소매를 입고 아기까지 있으면서 서두르지 않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남편이 보고 있다가 저런 사람도 있는데 나는 타프 밑에서 불평한다며 혀를 조금 찼다.


지난 계곡 캠핑 때부터 꽃과 사자에게 새 취미가 생겼다. 아빠 혼자 가는 게 싫었던지 자기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아이를 안은채 무거운 철제 쓰레기통을 같이 열어서 같이 버려야 만족하는 취미였다.


꽃과 사자는 이곳의 유일한 건물 화장실에도 관심이 많았다. 호스트가 전동차를 타고 청소하러 올 때마다 달려가는 걸 우리도 달려가 막아야 했고 우리가 화장실에 갈 때도 꼭 따라오려고 했다.


피스풀 밸리의 저녁


날씨 때문에 거의 포기했던 스모어를 오늘도 하게 되었다. 땅이 젖었는데도 장작불이 잘 붙었다. 낮잠도 자지 않고 놀던 사자는 내 품에서 잠들었고 꽃은 행복한 얼굴로 스모어를 먹으며 몇 번이고 모얼이라고 했다. 스모어가 some more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괜한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남편이 캠핑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느낌이 좋아.” “나도 좋아.” 공기를 한번 더 들이켜며 남편이 물었다. “그런데 왜 하루만 예약했어?” “왜냐면 여기 샤워도 없고 화장실도 푸세식이고..” “맞아, 그렇지.” “그리고 애들이 있어서.” 내 말에 남편과 둘 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름이 피스풀 밸리인데 우리하고는 안 맞잖아. 우린 평화로울 수가 없어.”


곧 사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꽃과 사자는 마지막 순간을 불태우다 텐트로 들어가 잠들었다.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지만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에 밖에 나가 타프를 걷어야 했다. 평화는 있는 듯 없는 듯 평화로운 캠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흐르는 강물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