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연애하기
독일인인 초록이와 연애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문화 차이 중 하나는 애정표현 방식이다. 본격적인 커플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연인이 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연인이 되기 전부터 초록이는 ‘너와 같이 있어서 좋아’라든가 ‘네가 여기에 있어서 행복해’와 같이 달달한 순간의 감상을 표현했다. 나는 초록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이 놀랍고도 고마웠다. 한편 이게 유럽에서 흔한 일인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한국인과 연애할 때 나에게도 물론 나름의 애정 표현 방식이 있었지만,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로 인해 어떤 감정인지를 전해본 적이 있던가? 유럽에서는 친구나 가족에게 ‘사랑해’라든가 ‘보고 싶어’라는 말을 덜 부담스럽게 일상적으로 하기도 하고, 포옹이나 가벼운 키스가 인사가 되기도 하는 등 우리와 다른 언어적 스킨십이 존재한다. 그러니 연애할 때 쓰는 단어나 화제도 우리나라와 조금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베를린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너와 같이 있어서 좋아’라든가 ‘네가 여기에 있어서 행복해’등의 애정표현은 물론 특별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놀라울 일이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자란 독일인 친구는 남자친구와 n 년째 동거 중인데도 여전히 집에서도 수시로 ‘너와 같이 있어서 좋아’ 뿐만 아니라 ‘좋아해’, ‘사랑해’ 등의 말을 서로 한다고. 우리 그룹의 다른 친구들 두 명도 독일인 남자친구/남편이 있는 독일인과 네덜란드인인데, 모두가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만 이걸 신기해하는 모양이었다.
한국어 문장 ‘네가 여기에 있어서 행복해’는 문법적으로 올바를지 몰라도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내가 경상도 출신이라 어색한 건지, 다른 한국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게 단지 초록이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화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이런 식으로 애정표현을 따라 하게 되었다. 그냥 적막이 흐를 때 ‘네가 여기에 있어서 행복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잘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이 사람이 곁에 있어서 행복한 것 같은데?’ 하고 나의 감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따금씩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언어가 더 낫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독일어를 배워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 또 하나 늘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어떤 새로운 관점을 통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단어, 표현이 한국어에 없어서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필요한 줄을 몰랐을 뿐이다. 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때로는 한국어에서는 너무 구체적이거나, 오글거리거나, 어딘가 어색한 그런 표현들이라 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모국어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라 모국어만 쓸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내 언어습관이 외국어라는 자극을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외국어는 이 언어를 숨 쉬듯 편안히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의식하며 단어를 고르게 되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사용하며 느낀 건, 내가 형용사를 많이 쓰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나는 뭐든 구체적으로 자세히 묘사하는 걸 좋아하는데 구어 한국어에서는 조금 과장되게 느껴지는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나 영어에서는 많이 쓰지만 한국어에선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단어들은 ‘아름답다’, ‘흥미롭다’, ‘신난다’ 등이다. 초록이의 ‘네가 여기 있어서 행복해’라는 독일어 문장도 사실은 정확하게는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아름다워(Schön, dass du da bist)’라는 뜻이다.
한국어에는 정말 아름답고 독창적인 관형어나 의성어, 의태어가 많지만 문학작품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일상 어휘는 어딘가 한정적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사물이나 사람, 풍경을 묘사할 때 ‘좋더라/괜찮더라‘ 혹은 ‘별로다’로 퉁치지 않는가? 한국어와 독일어의 어휘 차이보다는 언어 습관의 차이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독일어로 표현하기 힘든 한국식 감성도 있다. 독일어에는 ‘오구오구 그래쪄?’라는 식의 표현이 가능한 단어가 없(는 것 같)고, 가끔 얄밉게 굴고 싶을 때 ‘싫은데?’라든가 ‘미워!’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 적절한 번역을 찾지 못해서 아쉽다. ‘미워’를 영어의 “I hate you”에 해당하는 “Ich hasse dich”로 말한 적 있는데, 초록이가 그건 너무 센 표현이라고 나중에 이의를 제기했다. 불만을 나타낼 때의 ‘야’도 상응하는 독일어 단어가 없어 아쉽고, 심지어 ‘야’는 독일어에서 yes를 뜻하는 ‘ja’와 발음이 똑같아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야’하면 긍정이 되니, 분하다. ‘깨알 같다’와 같은 비유도 번역이 안 된다. 또 한국어의 ‘쫌!’이나 ‘아이고’는 너무 많은 뜻을 가져서 다른 언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건 흔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언어뿐만 아니라 애정을 나타내는 행동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초록이와 처음으로 불고기 쌈을 먹은 날, 내가 쌈을 싸서 그의 입 앞까지 갖다 주자 초록이는 자기가 싸 먹을 수 있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이건 한국에서는 애정표현을 뜻하는 거니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설명해야 했다. 반대로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 ‘하지 않았던’ 행동이 독일인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초록이의 언어습관을 따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늘 해오던 대로 ‘네가 여기 있어서 행복해’라는 말을 사용할 줄 을 몰랐을 것이고 초록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왜 늘 나만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초록이와 내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미묘한 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달콤한 착각이 유효한 걸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