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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pr 04. 2023

‘나’와 ‘너’를 찾아

우리말에 숨은 코드에 관한 고찰

나는 외국에서 살면서 느끼게 된 한국어의 특징이 너무 재미있고 신선하다. 그중 하나가 영어와 독일어에 비해 ‘나’와 ‘너’가 아주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맥락상 추측이 가능하고 굳이 강조하지 싶지 않은 이상 주어와 목적어를 흔히 생략한다. 그중에서도 ‘나’를 생략하는 일이 매우 잦다. 국어를 전공한 사람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비전공자인 나에게는 이것이 사회적 구조와도 맞물려있는 재미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영어의 “I love you.”라는 대사를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인 정답을 꼽자면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한 “사랑해.”가 될 것이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일기에 ‘나는’과 ‘오늘’이라는 표현을 가급적 쓰지 말라고 배웠다. 이걸 금지하지 않으면 일기의 99퍼센트가 ‘오늘 나는 xx를 했다.’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추측한다. 문법적으로 주어가 뭔지는 그리 중요치 않은 반면, 짧은 글이라도 ‘나는’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주어와 목적어뿐만이 아니라 소유관계를 나타내는 관형어 ‘나의’도 잘 생각해 보면 조심스럽게 쓰이는 편이다. ‘엄마’, ‘아빠’, ‘집’, ‘학교’, ‘동네’ 등 나와 밀접한 대상의 경우에 이들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바뀐다. “우리 엄마”, “우리 학교”, “우리 동네”에서 ‘우리’ 대신 ‘내’를 써보면 아주 어색하다. 영어와 독일어는 기본적으로 ‘나의 엄마’, ‘나의 학교’, ‘나의 동네’ 등이 쓰이고 구체적인 ‘우리’라는 집단을 강조하고 싶을 때만 ‘우리 학교’등으로 쓴다.


‘나’뿐만이 아니라 ‘너’ 역시 자주 사라진다. 첫째,  ‘나’의 경우처럼 맥락으로 알 수 있는 경우 ‘너’가 생략된다. “너 어제 뭐 했어?”는 너무 취조하는 것 같고 보통 우리는 “어제 뭐 했어?”라고 한다. ”당신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와 같은 질문은 듣는 사람인 상대방을 향한 것이라는 게 명백해서 ‘당신은’을 생략하고 쓰인다. “좋아해.”나 “사랑해.”와 같은 사랑 고백에도 제일 중요한 대상이 빠지는 이유가, 보통 맥락을 통해 이해하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의 지위나 관계 호칭이 자주 ‘너’(혹은 ‘당신’) 대신에 쓰인다. 상사인 사장님에게 “당신은 뭐 하셨어요?”라고 할 수 없다. 대신 “사장님은 뭐 하셨어요?”가 쓰인다. 또는 ‘언니’, ‘오빠’,  ‘형’, ‘누나’와 같은 호칭은 사적이고 가까운 사이라도 나이가 많은 상대에게 ‘너’ 대신에 쓰인다. ‘형수님’, ‘처제’ 등 인척의 호칭은 나이를 불문하고 ‘너’를 대체한다. “처제는 어디예요?”와 같은 문장에서 처제가 화자보다 어리다고 해서 “당신은 어디예요?”라든가 “너는 어디야?”를 써버리면 관습에 맞지 않고 선마저 넘은 느낌이다. 이러한 호칭은 우리 일상에 아주 깊게 스며있어서 뭐가 특별한 건지 보통은 느끼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사장님도, 박사님도, 뭣도 아닌 사람이면서 언니나 오빠 뻘도 아니고 친인척도 아닌 사람과의 대화에서 예의를 갖추고 싶은 경우 문장이 어딘가 어색해지는 경우를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예전 직장에서 고객 혹은 방문객을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서명하셔야 합니다.”, “이 분은 선생님 아들인가요?”와 같은 식이다. ‘당신’이라고 하면 예의에 어긋나 어쩔 수 없이 쓴 호칭인데 고객 중에 “저 선생님 아니에요!”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듣는 사람의 불편함도 이해한다. 간혹 연세가 지긋한 분들에게 ‘어머님’ 혹은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남에게 과도한 친근함을 표하는 것 같고, 또 자녀가 없는 노인에게는 실례이므로 조심스러웠다. 어찌 됐든 고육지책으로 ‘어머님’, ‘아버님’을 사용하는 일부 사례를 보면 2인칭 문제가 분명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2인칭(너)을 대체하는 호칭은 호격까지 대체하고 있다. 호격이란 “보라야, 비켜!”와 같은 문장에서 ‘보라야’의 역할을 말한다. 낯선 이에게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저기요, 비켜주세요!” 하는 것이 예다.


베를린의 한 한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던 당시, 스태프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나와 주방에서 같이 일하던 분들을 우리는 ‘요리사님’과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남자친구 초록이에게 “요리사님이 어쩌고 저쩌고”, “이모님이 어쩌고 저쩌고”라는 식으로 일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곤 했는데, 초록이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요리사님은 이름이 뭐야?”

“몰라. 이름은 왜?”

“어떻게 팀원의 이름을 모를 수가 있어? 너 그 동료 얘기할 때마다 ‘요리사’라는 직업으로 그 사람을 칭하고 있잖아(심지어 이모님은 네 이모도 아니고).”

“아… 한국어로는 그게 전혀 문제가 안 돼.”


독일어에서는 (영어권에서처럼) 나보다 나이나 지위가 높은 동료라도 서로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내가 동료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일인인 초록이에게 문화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니 한국어를 쓸 때 나는 2인칭 “요리사님도 주말 잘 보내셨어요?”, 3인칭 “요리사님께 여쭤 볼게요.” 그리고 호격 “요리사님, 잡채 하나 들어왔어요!” 모두 ‘요리사님’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 후 언젠가는, 나를 늘 잘 챙겨주시던 이모님이 곧 그만두실 거란 얘기를 초록이에게 했다. 이번에도 초록이가 작은 충격을 주었다.


“근데 넌 그런 이모님의 이름도 모르는 게 아쉽지 않아?”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물어볼 수도 없어? 이모님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름이 뭐예요, 이렇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지, 초록이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 직장에서 나는 ‘요리사’라는 타이틀이나 ‘매니저’ 혹은 ‘반장’과 같은 직책이 없었으니 그냥 ‘보라 씨’로 불렸고, 이모님은 직책은 없지만 ‘씨’로 부르기엔 다른 동료들보다 연세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모두의 이모가 된 것이었다. 나는 우리말로 얼마나 익명성이 보장된 대화가 가능한지를 깨닫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의 부모님이나 심지어 조부모님을 만나게 되어도 어르신들이 손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손윗사람의 이름을 부를 일이 없으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이름을 소개하지 않고, 그렇게 무명인 상태로도 관계가 호칭에 의존해 진전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 연배보다 낮은 사람이 주변에 많아지고 따라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관습적 어법 때문에 ‘나’는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건 뭔지 말할 기회가 적고 ‘우리’나 ‘내 집단’이 개인인 나를 어딘가로 꼭꼭 숨긴다. 상대를 보며 ‘네’가 누구인지보다 직함이나 항렬을 먼저 따져야 한다. 이는 여섯 살짜리가 일곱 살짜리와 친구가 될 수 없고 일종의 수직관계인 형동생으로 지내야 하는, 사소하고 귀엽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사회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또한 퇴직 후 사람들이 나를 ‘부장님’이 아닌 ‘저기요 아저씨’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겪어야 하는 자괴감이나, ‘아저씨’뿐만 아니라 ‘아가씨’와 ‘아줌마’등의 단어가 중립적이지 못한 호칭으로 쓰이는 현실은 어떠한가. 결혼이나 출산이 나를 가리키는 호칭을 “누구 엄마”, “누구 아빠”, “형님”, “동서”등으로 변화, 확대시키고, 이러한 호칭을 결정하는 관계와 서열에 잠식되어 정작 개인인 ‘나’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현대 국어 쓰임새를 되돌아보고 대안을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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