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곡점이 된 골목길

by 세바들

지금은 좁게만 느껴지는 저 공간. 한때 수많은 아이가 뛰어놀았던 골목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자치기와 구슬치기를,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와 소꿉놀이까지 하며 다양한 놀이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골목길에서 꿈이 익어갔고, 서툰 우정이 싹트기도 했다. 골목은 아이들의 정보가 집중된 소통 공간이자, 깔깔거리는 웃음꽃이 돌담장 사이로 스며들 때 추억이 만들어지는 소극장이었다. 해 질 녘, 누나의 매서운 눈흘김에 풀 죽은 표정으로 떠나야 했던 꿈의 놀이터. 하지만 지금, 그 골목은 굳게 닫힌 쇠 대문과 가득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로, 무거운 정적만 감도는 낯선 공간이 되었다. 나는 긴장되어 조심스럽게 걷는 불편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청소년이 되면서 골목은 점점 멀어져 아스라이 잊힌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 셋방을 구하기 위해 헤매면서, 골목은 다시 삶의 중심으로 찾아왔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신혼집을 주택 전월세로 구해야 했고, 햇빛조차 귀한 뒷방이 많아 발품을 팔고 또 팔았다. 마음씨 좋은 주인과 깨끗한 집을 찾기 위해 끝없이 걸었던 골목길이다. 담장 귀퉁이나 전봇대에 붙은 광고지를 보면 집주인의 인상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반듯한 글씨로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안내장 주인은 연세가 지긋하거나 조용한 성품이었고, 날림 글씨로 급하게 쓴 것은 젊은 주인이기도 했다. 작은 규모의 셋방 정보는 골목에서 직접 찾아야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세입자를 찾는 광고지를 보며 두리번거리거나 긴 시간 서성이는 이가 있다면, 그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일 확률이 높았다. 쉬는 날 골목길을 걷다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만나도 서로 모른 체해주는 게 예의가 되기도 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쏟고 온몸이 지칠 만큼 육체적 노력을 쏟아보았지만, 아내와 나는 가진 자금에 맞추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에게는 불편한 안식처를 내어주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면 길모퉁이 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던 그 골목길이 아닌가.

고생 끝에 운 좋게 마음씨 고운 집주인을 만나 2층 주택으로 이사했다. 첫아이가 학원에 가던 날, 나는 마침 비번이라 아내가 아이를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립심을 키워야 한다며 대문 앞에서 혼자 큰길로 나가라고 재촉하는 아내. 아이는 쭈뼜쭈뼜 망설이다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가기 싫은데도 결심했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직 어려 골목이 무섭기도 하고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것을 참는 모양새다. 나 역시 두려움이 있어 안쓰러운 마음에 조금 높은 곳에 올라 골목길을 내려다본다. 뒤돌아본 아이는 지켜봐 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아이는 때로 골목길을 놀이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슬며시 몇 걸음 먼저 뛰어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잠시 후 꺾인 골목에서 “어흥!” 하고 뛰어나오며 “아빠 놀랐지?” 한다. 이미 숨어 있었음을 알면서도 “아이고, 깜짝이야” 하며 놀랐다는 시늉을 해주면 아이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그 시절이 지금은 여린 추억으로 오버랩되어 미소 짓게 한다.


다행히 골목을 끼고 있는 주택들은 낮이면 대문을 열어 두어 이웃 간에 서로 알게 지내는 게 다반사였다. 골목 보안관은 역시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가 도맡았다.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거기 뉘시오?” 하고 다가서고, 그 사내는 쭈뼛거리다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파란 대문집 총각이 삼수 끝에 큰 회사에 취업했단다. 앵두나무가 있는 옆집 아저씨는 술을 좋아하여 부부간 다툼이 잦다며 소소한 가정사까지 꿰뚫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늦으면 늦은 이유를 묻기도 하고, 아이가 아프면 세세하게 경험적 진단으로 안심시켜 주기도 했다. 혹은 우리 부부의 신혼살림이 염려되었던 탓이었을까? 직접 따라나서며 자신의 집안일처럼 걱정까지 해주었으니 골목은 정으로 가득했다. 집주인과 세입자여도 서로 음식을 나눠 먹는 여유가 있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티를 내지 않았던 겸손함이 있었고, 노인과 젊은이에게는 세대 간 사랑과 존경심이 넘쳤다. 이웃의 정이 막힘없이 흐르던 곳이 아니겠나 싶다. 다시 말해 그 시절은 물질보다는 마음이 오가는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뒤돌아보니, 얽히고설킨 우리의 여정은 결국 골목길에서 시작해 골목길에서 다시 만나는 원과 같다.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은 넓은 신작로와 대로(大路)만을 걸어온 것이 아니었기에, 삶의 뒤안길이 주는 초라함과 쓸쓸함까지 안다. 때로는 막다른 골목길을 만나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컸지만, 어떨 때는 행운처럼 질러가는 지름길이 되어주었던 골목길이다. 지나고 보니, 우리의 인생이 다 그 골목이요 여기였다. 손등이 얼어 터지도록 구슬치기했던 소년이나 동요를 합창하며 고무줄넘기를 했던 소녀들이 환갑을 넘긴 지금, 우리 모두 다시 골목길로 찾아와야 할 나이가 되었다. 우리네 인생이 이토록 골목길을 닮았음에 다시 한번 놀라기도 한다. 슬픔과 환희, 꿈과 좌절의 모든 변곡점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곳. 바로 여기가 치열했던 삶의 현장이었음에 깊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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