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어촌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그 무렵은 밤이면 보석 같은 별빛 속으로 낮이면 양지바른 언덕에서 소몰이하면서 자랐다. 아이들은 이발비 때문에 대부분 스님처럼 까까머리를 했었고, 낮에는 계절과 관계없이 산과 들로 돌아다녀 얼굴과 몸, 피부는 검게 탄 모습이었다. 또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이라서 체격은 모두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형들로부터 이어받은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교복을 차려입은 중학생의 모습은 반듯하고 멋져 보였다. 더구나 그렇게 보기 싫었던 까까머리도 검은 모자를 쓰면 언제나 의젓하게 보였다.
나도 중학생이 되었다. 신입생은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아차린다. 모자는 크고 교복은 형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하여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고학년 졸업반이 되면 신체 발육에 따라 모자는 작아서 머리에 삐딱하게 걸치기가 쉬워졌고, 교복은 몸에 맞지 않아 어깨는 터질 듯이, 옷소매는 걷어 올린 것처럼 달랑하다. 모범생의 기준이 되는 목 부분의 깃은 양쪽을 고정해 주는 훅이 잠기지 않아서 풀어야 했고, 더러는 윗단추도 하나쯤 풀어야 호흡하기 편해지는 게 일반이다.
어떤 이는 행실이 나쁘다며 불량소년으로 질책하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아픔이기도 하다.
이 시기 청소년기엔 도시로 탈출 시도를 꿈꾸게 된다. 양지바른 곳에 모여 어느 학교로 진학할 것인지? 또래들은 그들만의 정보력을 총동원하기도 하고, 선배의 이야기도 귀담아들으면서 선택의 길을 찾기도 했다.
우린 그렇게 도시로 탈출하였고, 도시 청년이 되어 참 행복하다는 생각과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었다면, 고등학교 교복은 나름 자신만의 품위 수준을 말하듯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기도 했다.
그 무렵 지독한 가난으로 공부할 시간이 없어 책과 멀어진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시절은 여러 형제 중에 맏이가 되는 형이 진학하면 나머지는 산업현장으로 나가기도 하였고, 그 반대로 큰 형이 벌어서 동생을 진학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이 친구는 형 때문에 자신이 산업현장으로 먼저 나갔다. 그런 친구가 십수 년 후 시골에서 제법 든든한 자본가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가까운 어판장에서 소소한 일을 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주기도 하였기에 적응이 빠르기도 했었지만, 눈치 또한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다 차츰 번 돈으로 낡은 중고 트럭을 구입하여 생선 장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어판장에서 경매된 생선을 한 트럭 싣고는 정처 없이 떠났다고 한다. 나는 이 “생선을 팔지 못하면 거지일 뿐이다.” 그 이유는 생선은 썩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절박하게 생선을 팔았고 늘 재고로 남겨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요즘은 활어차에 냉장 시설이 잘된 기능이 좋은 차량이 많아도, 그 당시에는 얼음을 채운 후 떠났기에 녹기 전에 마쳐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고도 바다와 먼 산간 농촌지역을 거점화하다 보니 시골의 어르신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오가는 길에 농작물을 실어다 주기도 하였고, 비가 오면 댁까지 모셔다드리면서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그렇게 지낸 세월, 마을 어르신은 쾌활한 청년, 생선 장수가 왜 안 오나 하며 기다려 주기도 했다고 하니 그의 노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긴 세월 동안, 친구의 애환이나 노력을 세세히 나열하지 않아도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는지는 친구의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등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그 친구가 나의 스승으로 다가온 것은 내가 갓 대리로 승진했을 무렵, 동창회 모임에서였다. 요란스럽지 않은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아주기도 하고 시월의 소슬바람은 운치 있는 가을밤으로 안내하였다.
그렇게 소주잔을 나누며 밤새도록 들은 그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왔다. 말 한마디, 한마디 놓칠 수 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 내가 변해야 하는 지침이 되었고, 이후 나를 처절하리만큼 뛰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회사 규정인 직렬/직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은 말할 것 없었고, 동생 학비를 마련하고자 야간이면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일거리를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겠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그럴수록 일거리는 이어졌고 밤, 낯을 가리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밤이면 아르바이트 현장에서의 완벽한 이중 생활자로 자리매김한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내는 “당신은 회사에 미친 것 같아….”라고 말할 정도로……!!!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아니야, 이게 재밌으니까?”하고 웃으며 넘겼지만 얼마 후 이중생활은 완전히 접게 되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목적이 달성되어 홀가분하게 털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급변하는 시장에서 도태될 것 같아 다시 생각의 씨앗을 뿌려야 했다.
그 새로운 도전이란 대학원에서 재충전 기회로 삼아 다른 욕심을 가졌고, 진정한 나만의 꽃씨를 싹틔우고자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의 스승과 같은 ‘생선 장수 친구’가 있어서 직장생활이 힘든 줄 몰랐었고, 한 단계씩 변화의 과정을 만들 수도 있었다.
더구나 기술부서에서 영업부서로 옮긴 후에도 확고한 목표가 세워지면 힘들지 않게 도달하곤 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 의지가 약해질 때는 언제나 ‘내가 팔아야 할 상품이 생선이라면…’하면서 수없이 메시지를 던져 중심을 잡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생선 장수의 고통을 잘 모른다. 단 친구가 나에게 들려준 진솔한 삶의 현장 이야기는 도전할 용기와 인내할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친구의 삶에 눈높이를 맞추지는 못하여도 나는 나의 작은 영역을 지키는 행운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