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분국에서 배운 첫 사회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습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굵은 빗줄기 사이로, 나는 커다란 가방 하나에 이방인의 쓸쓸함을 가득 채운 채 서 있었다. 새로 이전을 앞두고 어수선했던 시외버스 정류장의 바닥은 진흙탕으로 질퍽거렸고, 그 흐트러진 풍경은 마치 내 앞날을 예견하는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나의 첫 발령지는 창녕 영산의 작은 분국이었다. 신입이라는 여린 명패는 선택권 없는 운명을 의미했다. 멀리서 보았을 땐 제법 듬직해 보였던 단층 건물은, 막상 곁에 서니 비바람에 야윈 듯 왜소한 모습이었다.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이곳은 민원 업무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딱딱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오늘 발령받은 신입입니다”라는 내 낮은 대답에, 공간의 온도는 이내 반가운 환대로 바뀌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에어컨 바람 앞에 서자, 비로소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천장 아래 빽빽하게 들어선 교환 장비들이 쉼 없이 자아내는 기계음은 마치 거대한 공설운동장에서 울려 퍼지는 응원 소리 같기도, 혹은 누군가의 간절한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심장 박동 같기도 했다. 전화를 거는 이의 기대와 받는 이의 불안이 촘촘하게 얽힌 그 소란함이, 이상하게도 나를 위로했다.
무심한 계절은 찰나의 가을을 건너뛰고 이내 혹독한 겨울의 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해 겨울은 내 생에 가장 시리고도 무거운 계절이었다. 군대의 추위가 보급된 온기로 버티는 통제된 고난이라면, 이곳의 추위는 오로지 내 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날 것의 고독이었다. 봉급의 대부분을 부모님께 보내고 남은 푼돈으로 전세금과 식비를 감당해야 했던 청춘에게, 절약은 선택이 아닌 처절한 생활 그 자체였다.
부산의 바닷바람과는 결이 다른, 영산의 칼바람은 낡은 하숙방의 문틈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보온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방 안에서 나는 매일 밤, 몸을 태아처럼 웅크린 채 아침을 기다렸다. 눈을 뜨면 전날 밤 놓아둔 물그릇에는 어김없이 하얀 얼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초대하지 않은 겨울이 방 안으로 들어와 함께 잠을 잔다는 말이 관념이 아니라 매일 아침 마주하는 서늘한 실체였다. 얇은 이불 끝자락을 아무리 끌어당겨도, 외풍은 얼음 송곳처럼 발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정보통신 광역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일렁이던 시기였다. 전국의 전화가 하나의 숨결처럼 연결되던, 통신 혁신의 초입이었다.
도시는 잠들어도 통신의 혈관은 멈출 수 없었기에, 낮과 밤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전화벨은 휴식의 정적을 깨우는 준엄한 명령이었고, 현장으로 복귀하는 발걸음은 곧 나의 사명이었다. 열 명 남짓한 인원이 거대한 통신망을 지켜야 했던 영산분국의 공기는 늘 긴장되었다.
선후배 사이의 규율은 서슬 퍼런 서리처럼 엄격했다. 신입이었던 나는 묻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힘들다'는 고백을 차가운 침묵 속에 삼키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버티는 것만이 그곳의 일원이 되는 유일한 통행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벽, 얼어붙은 물그릇을 바라보며 문득 자문했다. '이 시린 겨울은 과연 언제쯤 끝이 날까.' 그러나 나는 끝을 계산하는 대신 목도리를 고쳐 매는 쪽을 택했다. 당장의 추위를 원망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흐트러짐 없이 건너가는 것에 모든 생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산의 그 매서운 겨울은 내 육신을 단련시켰고, 그보다 더 단단한 마음의 근육을 길러주었다. 춥다고 응석 부리지 않는 법, 고단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법, 그리고 오롯이 혼자서도 삶이라는 계절을 통과하는 법을 나는 그 작은 분국에서 배웠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겨울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시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미숙한 청년에서 단단한 사회인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의 담금질이자, 뜨거운 여름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얼어붙은 아침과 치열했던 밤들이 차곡차곡 쌓여, 비로소 지금의 나라는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린 것이다.
하숙방의 그 시린 겨울은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차가웠으나 역설적으로 가장 뜨거웠던 성장의 계절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