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책상에 낯선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부천국제영화제 VIP 초대권 두 장이 들어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 직원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간 것 같았다. 부천에서 19년 정도 살았지만 영화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상영 중인 흥행작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굳이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을 관람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은 흥미보다는 작품성 위주의 예술영화이거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독립영화일 것 같아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밀폐된 상영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한동안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초대권을 사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VIP 초대권을 얻을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 같아 영화를 관람하기로 마음먹고 영화제 출품작을 찾아보았다.
부천영화제의 주제인 ‘이상해도 괜찮아’에 걸맞게 공포 스릴러 위주의 기괴한 괴담 영화들이 주요 출품작이었다. 평소 잔인한 호러물이나 무서운 공포 영화는 즐겨보지 않는 터라 예매를 할 만한 영화를 찾기 힘들었다. 홈페이지에서 출품작 시놉시스를 참고하여 공포 영화를 걸렀더니 몇 작품이 남았고 그중에서 상영 시간이 퇴근 시간 이후인 것들을 추렸더니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의 작품만 남았다. 개막작인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를 관람하고 싶었는데 이미 매진이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예매하려고 보니 모두 매진이었다. 이상해서 다른 영화들의 예매 현황도 모두 확인해봤더니 전체 상영작 대부분이 매진인 상태였다.
기사를 찾아보니 현재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로 인한 거리두기 4단계 시행으로 전체 좌석 수의 37%만 예매를 받는 것 같았다. 아무리 예매 가능한 좌석 수가 1/3로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모든 출품작의 예매가 빨리 끝날 수가 있나 싶어 조금 황당했다. 주최 측에서 초대권을 좌석 수에 비해 너무 많이 뿌린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살짝 화가 났다.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화제 참가에 대해 계속 망설였었는데 막상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관람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약간의 오기가 발동했다. 틈만 나면 영화 예매사이트에 들어가 취소 좌석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해보았다. 수도 없이 조회해보아도 생기지 않던 잔여 좌석이 영화 상영 하루 전이 되자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① 님비: 우리 집에 오지 마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웃고 싶던 차에 장르가 코미디라 예매했다. 웃을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코미디 영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 잔여 좌석을 발견해 영화 예매에는 성공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이 시점에 밀폐된 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퇴근 전까지 고민해야 했다. 시에서 주관하는 행사인 만큼 확진자 예방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공공기관보다 더 안전한 상영관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청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퇴근 후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5번 버스를 타고 현대백화점에서 내렸다. 상영관이 부천시청 내에 있어 영화 시작 시간인 8시 전까지 인근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백화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커피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식사했다. 영화 러닝 타임이 약 두 시간 정도여서 상영이 끝나는 늦은 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영화에 집중하려면 커피를 마셔두어야 할 것 같았다. 부천시청 인근에 맛집이 많이 있는 것 같았는데 늦은 시간에 배불리 식사하게 되면 졸음이 쏟아져서 집에 가고 싶어질 것만 같아 샌드위치로 적정량의 음식만 섭취했다.
소기의 목적 달성 후 백화점을 나와 시청으로 향했다. 외부 부스에 화려한 홍보물을 잔뜩 부착해놓았는데 막상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시청보다는 CGV 상영관이 좌석수가 많기 때문에 그쪽으로 관람객들이 몰린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한 공간에 사람이 몰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시청 안으로 들어가려면 터널같이 생긴 출입구를 통과해야 했다. 방역 때문인지 회오리바람을 분사해 출입자에게 묻은 균과 바이러스, 먼지 등을 날려버리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바람을 맞으며 출입구를 통과하려니 기계식 세차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먼지 묻은 자동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출입구를 지나 QR 체크인과 발열 체크를 한 후 스텝에게 영화 티켓을 보여주었더니 종이로 된 팔찌를 주었다. 워터파크나 클럽에 입장할 때 이런 비슷한 팔찌를 손목에 찼던 것 같은데 시청에서 왜 이런 팔찌를 차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야 한다고 하니 일단은 손목에 둘렀다. 상영 시간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시청을 둘러봤다. 시청 1층에 도서관이 있다고 본 것 같아 구경해보려고 했는데 운영 시간이 저녁 6시까지라 문이 잠겨 있었다. 시청 안 대부분의 시설물의 운영 시간이 저녁 6시까지인지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2층으로 올라갔더니 복도에 의자가 일렬로 놓여 있었고 거기에서 몇몇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하며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큰 창문 너머로 시청 밖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가로등이 켜졌는데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라 밝은 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건물에서 야근하면서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운치는 있겠다 싶었다.
영화 상영 시간이 다 되어 1층 판타스틱큐브 상영관으로 내려갔다. 스텝에게 영화 티켓을 보여준 뒤 또다시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을 한 후 상영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잔여 좌석을 예매한 터라 남아있던 좌석인 앞쪽 두 번째 라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리를 잡고 가방을 비어있는 구석자리에 놓아둔 뒤 공간을 둘러봤다. 독립영화전용관이라 상영관이 상당히 작았다. 관람 좌석이 몇 개 되지 않았고 스크린도 대형 극장의 가장 작은 상영관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즈였다. 안 그래도 영화관은 밀폐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해서 코로나 상황에 방문이 꺼려졌는데 이렇게 비좁은 공간은 더 위험할 것 같았다. 거리두기 최고 단계에 맞춰 방역시스템을 최대한으로 풀가동하고 있다고 하니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영화제에서 코로나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검사 대상이 된다고 해도 직장에서 배부받은 초대권으로 다녀온 것이니 비난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혼자 관람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조명이 서서히 꺼졌고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영 시작 10분 전 상업 광고가 흘러나오는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과는 다르게 영화제 상영작에서는 상업 광고가 나오지 않았고 처음 보는 낯선 크기의 화면에서 주제를 알 수 없는 짧은 단편 영상이 나왔다. 영화 시작 전 두 명의 감독이 관객에게 인사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는데 자막이 화면의 하단 정중앙이 아닌 상단 오른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이 특이했다. 화면 중앙의 영상과 오른쪽의 자막을 번갈아 가며 봐야 해서 불편했고 내용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할 때 무대 중앙의 배우와 사이드 화면에서 제시되는 자막의 대사를 번갈아 가면서 보느라 내용 이해도와 극의 몰입도가 떨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독은 코로나로 영화제에 갈 수 없어 관객과 직접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와 영화의 주제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 대본과 공간 연출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감독의 설명을 들으며 이 영화가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아닌 동성애, 난민, 종교, 국가, 인권, 사상 등 여러 복합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평소에 그다지 관심 있던 주제가 아니라서 이런 요소들로 어떻게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다소 의문스러웠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레즈비언 연인이 길 한복판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성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긴 시간 동안 상당히 지루할 것 같아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화제에 온 것이 살짝 후회되었다. 동성애, 마약, 총기, 칼, 무슬림, 네오나치와 같은 각종 자극적인 요소들이 등장해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약간의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잔인하거나 자극적인 영상을 일부러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 불쾌한 감정이 올라와서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잔인한 장면은 아니지만 불편한 갈등과 무슨 일이 곧 벌어지고야 말 것 같은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상영작을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를 중간에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주인공 중 한 명의 종교가 무슬림이었는데 종교와 동성애가 복잡하게 뒤섞여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권에 대한 종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우리나라에 난민이 유입되지 않은 상황이라 낯선 종교로 인한 갈등 상황이 크게 공감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감독은 지역 내 공장 근로자들이 점차 난민으로 대체되면서 생계를 위협받는 지역 주민들과 이교도 간의 갈등을 님비현상으로 비유한 것 같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시선을 통해 낯선 이교도인 난민을 배척하고 위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갈등이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쟁탈 경쟁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난민 유입으로 본인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것에 대한 반작용인 듯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실천할 것을 외치는 목사와 사회운동가 역시 긴박한 상황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었다.
무슬림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 보니 몇 년 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났던 낯선 국가의 긴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 생각났다. 그는 내 앞 좌석에 앉아 몇 시간 간격으로 열차 한쪽 방향의 창문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 내 울며 기도를 했다. 낯선 장소에서 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에 살짝 무서웠는데 다른 승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해주는 유럽인들의 태도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전화나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다운로드 받아놓은 영화를 보거나 낮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흔했다. 달리던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매점에 줄을 서서 간식을 사곤 했는데 그는 항상 가족과 화상통화를 했다.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애틋한 목소리를 통해 아빠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가족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외모와 행동이 낯설어도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며칠 동안 기차 안에서 먹을 음식을 챙겨 온 것 같았다. 나는 기차 식당 칸에서 식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식당 칸이 없는 기차를 탔다. 그 나라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해 매점에서 물을 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어쩌다 구매에 성공한 빵은 전혀 입에 맞지 않아 한 입 먹고 내려놓아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기차 타기 전에 미리 구매했던 초콜릿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이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승객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있기도 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인사 후 포장지 구경만 하며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나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는지 무슬림 승객이 가방에서 견과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본인이 먼저 먹는 모습을 보여준 후 같이 먹자고 제안을 하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평소 아몬드 초콜릿이 아닌 견과류를 따로 찾아 먹지는 않았는데 온갖 종류의 알 수 없는 견과류 중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난감했다. 개중에 땅콩처럼 보이는 익숙한 견과류를 하나 집어 먹었다. 내가 하루 종일 굶다가 음식을 먹으니 상대방도 안도하는 것 같았다. 여러 종류의 견과류 중에 구하기 힘든 것이 있었는지 다른 승객들도 그에게 허락을 구한 후 한 종류의 견과류를 집어 먹었다. 나도 그것을 먹어도 되는지 그에게 물어본 후 맛을 보았다. 특별한 맛은 모르겠는데 귀한 음식인 것 같았다. 그가 그 견과류를 가리키며 무엇이라 말을 했는데 낯선 언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공간을 잠시 함께 공유하는 낯선 이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칸에 탄 승객 중에 무슬림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았다. 서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도 그들의 시선을 통해 이방인인 나를 살피며 배려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러시아 승객들은 나에게 종교가 무슬림이냐고 물었다. 무슬림이 아니고 크리스천이라고 대답했더니 자신들도 정교회 신자라고 했다. 러시아 언어를 잘 몰라서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는데 저들에게 알라신께서 나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했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신의 사랑도 받으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무섭고 위험한 존재가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신도들을 경험해서 그런지 영화 속에서 무슬림을 향한 차별과 위협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먼 길을 나섰다가 위험에 처한 무슬림 부모를 통해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 가족으로 이루어진 똑같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갈등이 극으로 치닫다가 주인공의 용기로 상황을 극복하게 되는데 감독은 특정 종교나 국가, 이념에 상관없이 모두가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 같았다. 서로 사랑할 필요도 없고, 호감가질 필요도 없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사는 것이 어쩌다 이렇게 힘든 세상이 되었나 싶다.
영화 상영이 끝난 이후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퇴장하지 않았다. 영화제를 관람하는 관객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인 것 같았는데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진 코로나 시국에는 한시라도 빨리 해산하는 것이 새로운 예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녁 10시가 되기 조금 전에 시청 현관 밖으로 나서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 시간에 돌아 다녀본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밤 풍경이 매우 낯설었다. 시청 앞은 술집이 즐비한 번화가라 늦은 시간에도 항상 거리에 사람이 많았었는데 코로나 확진자 증가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면서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한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을 연 일부 가게들도 저녁 10시까지로 식당 운영이 제한되어서 그런지 손님이 한두 테이블밖에 없었다. 3명 이상 사적모임이 금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3명 이상 모인 테이블이 일부 눈에 띄었다. 물론 그들이 사적모임인지 아닌지의 여부까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이런 시국에 마스크를 벗고 고성을 지르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동성애, 난민, 종교, 국가, 사상과는 또 다른 인권과 님비 사이의 어디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했던 도시의 풍경이 SF 영화에서나 보던 황폐해진 유령도시같이 낯설게 느껴져 발걸음을 재촉해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