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와 <커밍 업 쇼트>
얼마 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했다. 방영 당시 여러 논란이 있었던 드라마인데, 다 보고 난 뒤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지적들도 있지만, 결론적으론 굳이 할 필요 없는 허튼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따듯한 차를 마시고서 왜 차를 마셔도 배부르지 않냐고 투정하는 것 같다고 할까나. 사람의 방황과 성장을 다룬 드라마에 왜 사회 비판적 요소를 넣지 않았냐고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나는 이 드라마를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봤다. 세상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마음을 닫은 아이는 어떻게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른은 어떻게 자신을 긍정하고 위로하게 되는가. 이것은 살아가는 의미를 모르는 청년과,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중년이 만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며, 그것을 돕기 위해 어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의 아이들, 그러니까 젊은 청년들은 어째서 어른이 되어가지 못하는가? 제니퍼 실바의 책 <커밍 업 쇼트>는 그 이야기를 다룬다. 아주 우연히, 드라마를 한창 보던 중에 이 책일 읽게 되었다. 그냥 도서관에서 서가를 뒤적이다 예전에 선배가 추천한 것이 떠올라 빌렸는데, 초반부에서부터 이 책이 <나의 아저씨>와 어딘지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조금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럴 때 ‘운명의 만남’을 느낀다.) 포맷도, 언어도, 방향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두 작품은 분명히 비슷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바로 ‘어른되기’의 어려움이다.
<커밍 업 쇼트>는 ‘불확실성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라는 부제처럼, 전통적인 성장의 경로가 사라진 시대의 청년들을 그린다. 과거에 사람들은 유년시절에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나고, 학교에 들어가 교사와 선후배들과 관계 속에 학창시절을 보내며, 취업을 해서 상사들로부터 사회생활을 배우고, 결혼을 해서 독립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어른이 되어갔다.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흔한 말처럼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문화적으로 정해진 이런 과정들을 거치고 완수해냈을 때 사회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도 성장이 완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유년시절-학생시절-취업-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모든 단계들이 삐걱거리며, 그 과정에서 삶과 세상을 알려줄 선배나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이 성인이 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커밍 업 쇼트>의 저자 제니퍼 실버는 노동 계급 청년 100명을 인터뷰하며 그 답을 찾아간다.
졸업, 결혼, 승진, 출산 등 성인기에 이르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성인이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살면서 정성스레 모은 자아의 조각들을 헝클어뜨리는 불발된 약속들-무용지물이 된 졸업장, 뜻밖의 해고, 망가진 관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책은 우리 삶과 관련해 당연시되던 모델들-관계, 일, 시간, 헌신commitment 등의 측면에서-이 쓸모없고 도달할 수 없으며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룬다. 여러 노동 계급 청년처럼 브랜든과 다이애너도 성인이 되는 당연한 경로로 간주되던 것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세계에서 자랐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끼지 못한다.(28쪽)
나는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아이유] 분)이 이런 청년의 한 사람이라고 봤다. 그녀는 조손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부모 빚 때문에 사채업자에 시달리고 자기 방어로 살인까지 하면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밟지 못한다. 커서는 빚을 갚고 살아가기 위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한다. 그렇지만 학력도, 경력도, 연줄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식당 설거지나 택배 분류 같은 단순한 일뿐이다. 운 좋게 대기업 파견직으로 가게 되지만, 거기서도 하는 일은 영수증 정리와 우편물 배달 정도며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다. 그냥 투명 인간처럼, 혹은 사무실의 사무용품처럼, 다른 (정규직) 직원들과의 소통이나 교감 없이, 하루하루 일한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경직’되어 있다. 그 경직됨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이들이 취하는 자기보호 전략이다.
노동 계급 청년들은 제도에 의해 거듭 당혹감과 배신을 경험하며, 타인에게 의존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유연’해지는 법, 즉 단기적인 헌신과 환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는 ‘경직’된 태도를 취한다. 이들이 안정된 일자리와 안전한 미래를 얻고자 싸우면서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바라볼 때 이 ‘경직됨’은 젠더와 인종의 선을 따라 특히 심해진다.(커밍 업 쇼트, 60~61쪽)
이 구절은 <나의 아저씨>에서 유일하게 이지안을 걱정하는 어른인 박동훈(이선균 분) 부장의 다음 대사와 묘하게 겹친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런데 여기서 ‘일찍 커버린다’는 표현은 전통적인 의미의 성장을 뜻하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을 줄 아는 ‘어른’으로서의 성장이 아니라,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자립으로서의 성장이다. 혹은 고립이거나. 극중에서 이지안은 의도적으로 타인을 냉랭히 대하고 거리를 두며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의 청년들은 그것을, 그것만을 성장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내가 인터뷰한 남녀 모두 성장이란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거듭 말했다. (…) 이들은 자신이 철저히 혼자고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며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외부의 도움에 기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청년들은 타인을 의심하고 불신해야 한다고 배운다. 많은 이가 부당한 상황을 참고 견디며, 자립과 원자화된 개인주의를 자기 가치나 존엄과 동일시한다.(커밍 업 쇼트, 160쪽)
<커밍 업 쇼트>에 따르면, 삶의 경로가 뒤엉클어지고 끊어지면서 성장의 의미가 바뀌었다. 취업, 결혼, 가족이라는 지표들을 달성할 수 없게 되면서 내면에 집중하는 태도가 나타났다. 그런 청년들의 서사에서 성장은 사회문화적으로 공인된 어떤 것을 달성함으로써 이뤄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시련과 혼란을 극복하고 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확신함으로써 온다. ‘나는 과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 힘들기도 했지. 하지만 그 일들을 겪으며 이만큼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었어.’ 이런 치료 서사는 과거에 자신의 겪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성장을 설명한다. “고통이 만연하고 노동과 가족을 신뢰할 수 없는 무드 경제에서는 재정 독립, 경력, 결혼 같은 전통적인 지표가 아니라 심리적 발전-금주 성공, 중독 극복, 정신 질환과 벌이는 전투, 혹은 단순히 아이 낳지 않기-을 통해 성인 자격을 갖추게 된다.”(233쪽) 내가 보기엔 요즘 심리치료나 상담, 자아찾기의 유행(국민 상담가로 떠오른 오은영 씨의 인기에서 보듯)도 이와 관련돼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자아에 집중하는 태도가 뭐가 문제일까? 사실 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에 집중하라는 건 과거부터 내려온 현자들의 가르침이 아닌가? 치료 서사를 통해 스스로의 존엄을 챙기고 성장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근본적인 두 가지 한계가 있다.
첫 번째는 그것이 자기 외부의 문제를 개인화시킨다는 점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장, 취약한 가족, 공허한 제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 안전망” 때문에 생긴 일임에도 자기 탓을 하게 된다. 고난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치료 서사가 성인기로의 통로로 활용될 때 생기는 주된 문제는 이 서사가 자아를 성공, 행복, 웰빙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변형한다는 것이다. 치료 서사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자기 삶의 영웅, 피해자, 악당으로 여기게 만든다. (…) 예측 불가능한 시장, 취약한 가족, 공허한 제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 안전망으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자아-혼자고 확신 없는-는 “스스로를 만들거나 망칠 힘”을 타고난다. 실제로 정보 제공자 100명 중 다수인 70명 정도가 스스로를 가장 큰 리스크로 여긴다고 답했다.(커밍 업 쇼트, 255쪽)
두 번째는 치료 서사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고 존엄을 얻게 되는 것도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정은 사실상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 인정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하는 행위는 증인을, 힘겹게 획득했지만 한없이 허약한 자아를 듣고 승인해 줄 인정하는 주체를 요청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은 박동훈이 “착하다”고 칭찬해주자 마음을 조금 녹이게 된다. 아마 그것이 그녀에게는 할머니를 돌보며 일하는 자신이 인정받은 첫 경험이었을 것이다. 박동훈이 살인을 한 자신의 과거를 알고도 변호해주었을 때는 주저앉아 오열한다. 지울 수 없는 자신의 가장 큰 상처이자 치부를 감싸주는 누군가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녀의 과거는 긍정되었다. 스스로도 무가치하다고 여겨온 이지안의 현재는 드디어 의미 있게 되었다. (물론 박동훈 역시 이지안으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단단히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인정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드라마와 달리, 대부분의 청년들은 이지안과 달리 박동훈 같은 아저씨를 만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말이지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을 이용하고 착취하기 일쑤며 충고랍시고 갈구기나 하고, 따듯한 자리를 내어 주지는 않는다. 이지안은 동네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장례(‘어른되기’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청년들이 얼마나 될까? 어른들은 ‘요즘 청년’들이 싸가지 없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친절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친절할 수 있을까? 오늘날 청년들이 타인에게 가혹하다면, 그들 자신이 타인과 제도로부터 가혹하게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부끄러웠던 이유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바를, 나는 지금 어린 세대들에게 해주고 있는가?
마지막에 이지안은 어른들의 도움으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상처 받은 자아를 치유했을 뿐 아니라, 괜찮은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게 됐다. 항상 무표정의 외톨이였던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며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서로 동등해진 입장에서 이번엔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박동훈처럼 나도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 드라마를 인생작으로 꼽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이것은 판타지지만, 동시에 추구하고 싶은 이상(理想)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어른되기’의 경험을 겪지 않으면서 어른이 된다. 여전히 취업-결혼-가족이 성장기의 지표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현실에서, 이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과 고난 극복의 스토리로 성인 자아를 구축하려 한다. “자신의 일자리나 미래에서 내재적인 의미와 희망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은 불확실, 혼란, 배신, 실패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불확실, 혼란, 배신, 실패를 극복하는 것은 상당한 자원과 도움이, 즉 적절한 생활을 위한 경제력과 자신을 인정해주고 북돋아줄 타인과의 관계가 필요한 일이다. 이지안은 박동훈과 만나 그 모두를 얻고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청년들이 그러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질문은 계속된다. 우리는 청년들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할까?
그러나 감정적인 해결책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이가 건강한 자아다움에 대한 저만의 비전을 기획할 도구나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족이 고통의 원천이라 생각하는 청년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과 분노와 배신감을 소통하지 못한다. 거부와 고통의 경험은 계속 승인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 정신 질환 범주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응답자들은 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리고 중독을 물리친 이들은 실업, 빈곤, 절망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다시 약물과 알코올의 유혹을 느낀다. 성인기의 삶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감정들을 통제하고 자아를 변형했음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물질적이거나 상징적인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무드 경제라는 덫에 걸려 이 경제가 제시하는 가치 있는 개인다움의 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깊은 상처다.(커밍 업 쇼트, 275~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