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에 생리가 겹쳐도
아무리 의욕 넘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쌓은 공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마는 날이 있습니다. 저에게 한 달에 한 번쯤은 무조건 찾아오는, 바로 ‘날씨도 흐린데 생리까지 겹친 날’인데요. 저는 생리 기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무기력해지진 않지만, 생리 기간 중에 비가 오거나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이 겹치면 그날이 통째로 엉망이 되곤 하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탓인지 늦잠을 자버리고, 잠에서 깨도 침대 밖으로 나오기 싫고, 동작도 굼뜨고, 생리혈이 샐까 봐 운동을 하기도 조심스럽고(이건 핑계일까요), 심한 경우에는 계속 잠만 자다 저녁을 맞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꿀꿀하고 생산적인 일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지요. 아무래도 하루의 시작부터 어긋난 탓일까요. 특히 햇빛을 좋아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저로서는 안 그래도 흐린 날에 기운이 솟지 않는데, 생리까지 겹치니 오죽하겠어요. 벌써 몇 달째, 생리 기간에 흐린 날이 하루 정도 꼭 겹치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전 늘 스스로를 다그치고 책망합니다. ‘오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하루가 다 갔어!’ 하면서요. 하루종일 뒹굴거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찝찝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하지 않았다는 조급한 마음도 들고요. 유난히 며칠간 잘해오다가 고꾸라진 날이면, 그 실망감이 더 큽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날이 찾아오면 분노에 휩싸이는 대신, “그런 날도 있지”라고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오히려 한 달에 한 번씩 온전히 내 몸이 원하는 속도에 너그럽게 맞춰주는 날로 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오늘, 그날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왠지 잠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싶었더니 바깥이 무척 흐리더군요. 늦잠을 잤다는 찝찝한 기분에 바로 일어나 요가를 할 의욕도 나지 않아 책상에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원래는 책상 앞에 똑바로 앉아 책을 읽는데, 이불 밖으로 나오기도 싫어 빈둥거리며 읽었습니다. 어제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 남아 포장해 온 찜닭을 데워 점심을 먹었는데, 냄비를 몽땅 태워 자국을 없애기 위해 한바탕 씨름도 치러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부엌은 엉망이 되었고, 지금쯤이면 다 처리했을 일들도 아직 하나도 손대지 않은 상태지요. 지난 일주일간 모처럼 잘 쌓아왔던 루틴이 무너져, 찝찝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스스로에게 분풀이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니 마음은 한결 편안합니다. 평소라면 시간을 체크하고서 ‘벌써 4시인데 아무것도 안 했다니!’ 하며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이려 애썼을 텐데, 지금은 생리를 치르고 있는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려는 각오로 있습니다. 느리게 움직이면 느리게 움직이는 대로, 설거지를 미루고 싶으면 미루고 싶은 대로… 오늘만큼은 제가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하든 눈감아주기로 했지요. 그러니 마치 대접을 받는 듯, 미묘하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계속 흐리지 않고 흐렸다 밝아졌다 하는 변덕스러운 오늘 날씨처럼요.
매달 찾아오는 생리는 성가십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제 몸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 원상태로 되돌리는 의식을 치르는 일이기도 하지요. 몸도 마음도 부담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주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호르몬도 그것만을 위해 움직여주고 있다면, 저도 마냥 불평하는 마음보다 축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의식을 함께 견뎌보는 마음을 가져볼까 합니다. 몸에 다정한 움직임을 취하고, 몸에 다정한 음식을 먹고, 몸에 다정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지요. 생리할 때 좋은 요가나 운동을 찾아서 따라 하고, 몸과 마음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더욱 천천히 낮춰 봅니다. 평소처럼 최대한 많은 걸 부지런히 해내려고 욕심부리지 않고요.
비록 루틴은 엉망이 되었지만 오늘 하루 내 마음이 내키는 순서대로 얼렁뚱땅, 내키는 일들을 천천히 해 보려고 합니다. 평소보다 4시간 늦은 이 <오늘의 기본> 글을 업로드하고 나면,잠시 바깥에 나가 산책을 하고 와야겠어요. (냄비를 처리하느라 못 쓰게 된 수세미도 새로 사 오고요!)
그럼 모두의 흐린 날이 천천히 안녕하기를 바라며, 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