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학창 시절 때 제가 가장 열정적으로 심취해 있던 취미라고 하면 역시 작곡일 것입니다. 조금의 흥미만 있으면 곧바로 장래희망으로 귀결시키곤 했던 어릴 적에는 취미에 따라 꿈이 마구 바뀌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작사가였는데요. 대여섯 살부터 피아노를 쳐 왔기에 직접 만든 작사 노트에 가사를 쓰고 피아노로 그 가사에 멜로디를 붙이는 식으로 작곡을 즐겼습니다. 중학교 때는 음악실을 아지트로 삼아서, 4교시 끝나는 종이 치기가 무섭게 작사 노트와 악보를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단 한 대뿐인 피아노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는 디지털피아노가 있어 헤드폰을 끼고 밤낮 가리지 않고 곡을 만드는 데 몰두했지요. 그렇게 세어 보니 총 80곡이 넘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열정의 심지가 닳은 것은 대학교에 올라오면서였습니다. 서울로 진학하면서 피아노가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1~2년은 한 달에 한 번 본가에 내려올 때마다 피아노를 치곤 했습니다. 휴학을 해서 아예 내려가 있었을 때는 치고 싶을 때마다 자유롭게 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뿐, 저의 세상이 더 넓어져 훨씬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혹은 악보를 볼 때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능숙하게 계이름을 읽지 못한다는 좌절감 때문일까요. 점점 피아노를 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그 이후로는 피아노 뚜껑조차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몇 달 전, 오랜만에 쳐 볼까 싶어 뚜껑을 열어 봤더니 하얬던 건반은 옥수수를 빙자할 만큼 누렇게 바랜 데다가 전원도 켜지지 않더군요. 10년 간 함께 했던 반려 피아노가 그렇게 생을 마감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대학교도 졸업하겠다,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본가의 방을 한바탕 정리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사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악보를 그리지는 못했기에 멜로디는 오로지 제 머리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오랜만에 펼쳐 보니 작사 노트에 쓰인 수십 곡들 가운데 제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곡은 손에 꼽았습니다. 그 사실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지요. 이대로라면 학창 시절을 다 바쳐 공들여 만들었던 나의 창작물이 흔적도 없이 증발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꼭 곡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더라도, 한때 나의 가장 유능한 재능 중의 하나였던 피아노 연주가 더 이상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게 되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절박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작사 노트를 서울에 들고 왔습니다. 부랴부랴 집 근처 피아노 연습실을 검색해 저번 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으니 마치 입시 면접을 보는 것처럼 긴장이 되더군요. 지금 느끼는 떨림이 설렘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이 모호하게 느껴졌습니다. 몇 년 만에 동창생을 만났을 때 들 법한 어색함이 저와 피아노 사이에 감돌았지요. 작사 노트에 기록된 곡들의 멜로디를 되짚어가며 건반을 두드리기를 한 시간, 실력이 굳어 충분히 연주하지도 못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전에 없던 충만감과 설렘이 마음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제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번 연도에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 예전에 했던 것을 다시 도전하거나 구멍이 난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취미의 영역에서는 이 피아노가 되는 셈이지요. 모두들 전례 없이 자기계발이나 자기만의 시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요즘,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즐겨야 할지 좀처럼 찾지 못해 고민이라면, 한때 즐겼던 취미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느샌가 흥미를 잃어서 실력도 애매하게 멈추고 만 것, ‘그러고 보니 나 이런 거 좋아했지’하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학창 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나의 생활에는 흔적도 없지만 그 시절만큼은 내게 전부였던 열정의 대상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 이미 한 번 도전했던 취미를 다시 시작해 보는 일이 소중한 이유는, 그 취미야 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자석처럼 끌어오듯 내 세상에 들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 도전하게 된 취미 가운데는 좀 더 역량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나 겉보기에 근사해 보인다는 허영심 때문에, 또는 남들이 다 즐겨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어 유행 따라 도전하게 된 것들이 섞여 있곤 합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취미를 통해 부차적인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어렸을 때 자연스레 마음이 동해 시작하게 된 취미는 우리가 세상을 신경 쓰기 전 오롯이 나를 행복하기 위해 끌어당긴 것들입니다. 그걸 능숙하게 즐길 수 있는 싹이 이미 내재되어, 몰랐던 나의 잠재성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지요.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취미를 되찾는 것은 단순히 어릴 적의 열망을 되찾는 것을 넘어, 잊고 있던 나의 일부를 되찾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앞으로의 잠재성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한때 나의 전부였던 소중한 세상이 있나요? 얼마간 배웠던 악기, 학원을 다니다 관둔 운동, 심지어는 시간을 즐겁게 때우기 딱 좋았던 만화책까지… 그 세상을 지금의 일상에 다시 한번 데려와 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품고 있는 열망과는 다른 모양의 열망을 맛보며, 한층 감미롭고 톡톡 튀는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