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은 모험을 위한 보험
오랜만에 다시 일본에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연말연초를 일본에서 보내는 동안,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제 일상의 화두는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아예 일본에 정착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에, 두 달 전쯤의 긴 여행은 나중에 내가 이곳에 정말로 거주하게 된다면 과연 양질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7일 차쯤 되었을 때, 제가 일본에서 보내는 일상과 한국에서 보내는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집이 아닌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지내고 생활의 도구와 서비스가 일본의 시스템에 따라 구비되어 있으니 다른 부분도 많지만, 말하자면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일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좋아하는 공간을 찾아 탐방하고, 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지하철을 타거나 웨이팅을 할 때 습관처럼 책을 꺼내어 읽고, 30분 내외의 거리는 걸어 다니며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 것들이요.
사실 첫째 날, 밤이 깊은 시각에 숙소를 처음 도착했을 때 설레는 한편 낯선 느낌에 휩싸여 조금 외로운 기분을 느꼈습니다. 번화가가 아니라 여행으로는 들를 일 없을 생소한 거주지 동네에, 유난히도 적막한 밤거리, 얼굴 모르는 이웃들과 평판을 알 수 없는 가게들… 게다가 그 좁은 골목에서 헤매기까지. 겨우 샤워를 마치고 TV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실 때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간혹 낯선 환경에 내몰렸을 때 내 취향의 일상을 떠올리면 든든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씻고 와서 왓챠로 좋아하는 영화 보고 자야지, 와 같은 사소한 루틴이라도 한국에서 했던 것을 여기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드는 어떤 안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일들, 일상을 쌓아가며 즐겼던 일들이 어디를 가든 나를 든든하게 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나다움의 열쇠가 있으니 그것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어딜 가든 나를 나답게 지탱해 줄 생활의 주춧돌이 될 테니까요. 그렇기에 자주 환경이 바뀌거나 정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일수록, 어떤 곳에서도 나를 나이게끔 하는 나의 ‘기본 취향 생활’을 가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행 내내 저는 언젠가 정말로 일본에서 살 수 있을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여행으로 와서 크게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건, 조만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기약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고민 끝에 내린 답이 바로 ‘생활’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든 나답고 충실히 다져 놓은 생활만이 나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훗날 일본이 아닌 그 어디를 가든, 지금 있는 자리에서 꼼꼼히 즐겁게 쌓아둔 매일매일이 그곳에서의 생활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면서 다짐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매일의 일상을 아끼고 끌어안으며 제대로 생활하겠다고요. 어느새 한 보따리 쌓인 생활의 규칙들을 데리고, 어디로든 모험을 떠나볼 언젠가의 그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변수 많은 모험에, 매일매일 나답게 쌓아둔 생활은 나를 든든하게 지켜 줄 보험이 될 테니까요.
실은, 이 마음이 <오늘의 기본>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취향을 쌓아가듯, 매일매일 한 편씩 저의 기본의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딜 가더라도 변함없이 습관처럼 행하는, 나만의 생활의 단면들이 있나요? 환경이 바뀌어도 나를 여전히 나이게끔 하는 기본의 취향이 있나요?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