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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에 책 한 권씩 들고 다닙니다

오늘 내 곁을 지켜줄 영감의 부적

by 위시

어딜 가나 가방 속에 꼭 들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책 한 권인데요. 처음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방에 책이 없으면 허전에서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환경 속에 저를 두는 것, 그것이 저에겐 일상의 규칙이자 안심입니다.


자투리 시간일지라도 의미 없는 소음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장 큰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교통을 타면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어 각종 SNS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하릴없이 인스타그램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편도로 2-30분 정도 걸린다고 하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왕복으로 치면 무려 1시간이나 SNS를 염탐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책을 읽으면, 이동 시간은 곧 길거리에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영감과 정보로 채울 수 있는 하루의 귀중한 시간이 됩니다.


가방 속의 책 한 권은 주로 대중교통을 탈 때 쓸모를 발휘하곤 하지만, 그 존재가 가장 빛을 발할 때는 예상치 못한 '기다림'의 순간입니다.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상대에게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나요? 혹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시간이 남은 적도 있을 테지요. 그때 저는 당황하거나 기분 상해하는 대신 자연스레 가방을 열어 책을 꺼냅니다. 틈새를 타 몇 페이지 정도는 거뜬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늦는 상대에게 화를 낼 이유도 없습니다. 보다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천천히 오세요'라는 말을 진심으로 건넬 수 있게 되지요.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가 어른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된 날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가장 일찍 도착하여 30분 남짓한 시간을 식탁 위에 앉아 기다려야만 했지요. 휴대폰을 보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땅히 할 것 없는 상황에 초조해지려던 순간, 아빠의 차에 내려두고 온 가방 속 책 한 권이 떠올랐습니다. 즐거운 안심과 함께, 아빠에게 차키를 받아 책을 꺼내왔습니다. 코다리 식당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라니 무척 이질적이라 누군가 보면 우습기도 했겠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한지 별말 없이 내버려 두었지요.


가끔은 책을 들고나갈지 말지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야 하거나, 친구와 함께 대중교통을 탈 것 같은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책을 꺼낼 시간이 도통 생기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마치 부적처럼 일단 챙기고 봅니다. 책을 두고 가면 반려견이나 친구를 내버려 두고 가는 것마냥 마음이 헛헛하고 도무지 든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실컷 무겁게 책을 가지고 나가도 결국 한 페이지도 거들떠보지 못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을 계산하여 일부러 책을 집에 두고 외출하면 꼭 예상과 달리 '떠 버리는 시간'이 생기고 맙니다. 그럴 때마다 '아, 역시 들고 나올걸!' 하는 탄식을 지르며,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해 놓은 직접 쓴 소설을 읽으며 고칠 곳을 찾고 독서의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여행을 갈 때도 책은 필수품입니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일 경우 더욱 귀중한 물건입니다. 어딜 가든 내 곁을 지키며 나의 여정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반자 같은 존재지요.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어느 한 곳에 느긋하게 머무를 때, 카페에 갔을 때 등 언제나 책을 꺼내 봅니다. 책 속의 주인공 또는 저자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지요. 여행 내내 읽었던 책을 펼칠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특별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여행 내내 뿌렸던 향수를 맡을 때 그곳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책도 그때의 기억을 꺼내볼 수 있는 소중한 아카이브이자 풍부한 질감을 가진 필름이 됩니다.


친구 E도 저처럼 언제나 가방에 책 한 권을 꼭 들고 다닙니다. 고맙게도 제가 책을 출간하며 사은품으로 제작했던 작은 가방에 말이지요. E와 만날 때면 서로의 가방 속에 든 책을 얘기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바뀌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도 다채롭고 이 김에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 주기도 합니다. 이렇듯 가방 속에 든 책 한 권은 요즘 서로의 일상의 화두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오브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가방 속에 넣을 책으로는 이왕이면 읽고 있는 책 중에 가장 가볍고 얇은 것을 고릅니다. 하지만 무게만을 기준으로 삼기 보다 오늘 나의 기분과 입맛에 따라 그날그날 끌리는 책을 고릅니다. 책의 무게가 부담스럽다면 전자책을 이용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종이를 직접 넘기며 읽는 감각이 좋습니다. 책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 때문에 가방을 사는 기준도 확실합니다. 아무리 디자인이 예뻐 혹하는 마음이 들어도, 책 한 권도 들어가지 못할 작은 사이즈의 미니백은 사지 않습니다. 자주 들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넉넉한 크기일 필요도 없습니다. 지갑과 책, 립스틱이 소지품의 전부일 정도로 단출하기에, 정말이지 말 그대로 '책 한 권만' 거뜬히 딱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의 가방이 저에겐 가장 알맞습니다.


하루동안 들고 다니는 가방 속 책 한 권은 영감 넘치는 오늘을 위한 부적입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 대신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깨를 차분히 내려 앉히는 적당한 지식의 무게감, 언제든 지혜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는 자유로움, 나의 소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든든함. 이 모든 고양적인 감정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는 얼마나 근사한 하루가 될까요?


버스 안에서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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