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욕실의 디테일
저는 한 번 물건을 들이면 꽤 오래 사용하는 편입니다. 학창 시절 돈이 없을 때 자취를 하며 들인 습관 탓인지, 웬만한 살림은 쉽게 교체하려 하지 않지요. 그래서 지금도 방을 둘러보면,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구매했던 전자렌지와 밥솥, 쓰레기통, 양치컵 등이 그대로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수건도 그중 하나로, 자그마치 7년째 사용했습니다. 집 안의 물건에는 수명이 있다고 하지만, 수건은 오래 사용한다고 해서 ‘망가지는’ 물건은 아니니까요. 물론 기능을 잃는 것만이 수명의 전부는 아니기에, 부엌의 설거지 수세미나 베개 커버, 속옷처럼 세균 번식에 예민하거나 표면이 닳는 물건들에는 ‘교체 주기’라는 것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른생활 교과서’에 적혀있을 법한 현실과 동떨어진 교체 주기를 꼬박꼬박 지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요. 특히 자취생에게 살림을 건전지 갈아 끼우듯 바꾸는 일은 거의 숙제와 같은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집 안의 많은 물건을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쓰자’라는 마인드로 오래 사용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수건은 주기적으로 교체가 필요하다는 개념조차 모른 채 7년이나 썼습니다.
처음 수건을 교체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던 것은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였습니다. 해가 바뀌면 집 안의 수건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두 분의 ‘새해 루틴’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는데요. 기능이 꼭 다하지 않아도, 물건을 교체해 주는 일은 일종의 정화의 의식이 될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사를 가게 되면 그땐 한 번 바꿔야지...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그 생각이 문득 간절해진 건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하루종일 일하다 보니, 퇴근 후 맞이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오롯이 나를 반기고 토닥여주는 아늑하고 쾌적한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집 안의 물건 하나하나가 이왕이면 더 아름답고 질 좋고 산뜻했으면 하는 욕구가 생겼지요. 이제는 돈도 벌겠다, 한 푼이라도 저렴한 물건을 사기 위해 다이소를 가던 학창 시절의 그늘에서 벗어나 집 안 곳곳의 디테일을 하나둘씩 업그레이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현관, 욕실, 부엌... 구역을 정해 차례대로 차근차근. 한끗 더 쾌적한 생활을 만들어 가기 위해 바꾸거나 새로 들일 수 있는 물건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스탠다드 프로젝트(Standard Project)‘. 기본 이하였던 살림들을 ‘기분 좋은’ 기본의 물건으로 단장하는 작은 프로젝트에 돌입했습니다.
스탠다드 프로젝트의 첫 단계는 먼저 해당 공간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욕실’이란 과연 어떤 공간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볼 일 보고 후다닥 씻고 나올 뿐인, 집 안에서 가장 더럽고 찝찝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고민하면 할수록 욕실은 정화와 환대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는 환대의 공간이자, 또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민낯을 마주하고 정화하는 순수한 공간이었지요. 또 나의 몸에 직접 닿는 물건들의 집합소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느 공간보다 깨끗하고 내게 다정해야 하는 곳, 바로 욕실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이야말로 수건을 바꿔줘야 할 때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7년간 썼던 수건은 여전히 물도 잘 닦이고 특별히 헤진 곳도 없지만, 너무 얇아지고 거칠었습니다. 그 감촉이 익숙하여 거친 줄도 몰랐지만, 부드러운 수건을 만져 보니 제가 쓰던 수건이 한순간에 걸레짝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만 이 수건을 놓아주라는 계시였을까요, 마침 제가 몸 담고 있는 브랜드에서 타월이 출시되어 옳다구나! 하고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집에 데려왔습니다. 7년 만에 드디어 새 수건을 들였습니다.
‘기분 좋은 생활’이라는 것은 디테일에서 옵니다. ‘그냥 수건’이 아닌 ‘더 부드러운 수건’, ‘그냥 수건’이 아닌 ‘좋아하는 색의 수건’이 바로 삶의 질을 결정짓는 한끗을 만드는 것입니다. 얇고 거친 수건을 쓸 때도 사실 일상은 딱히 불편하지 않습니다. 수건이란 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휘리릭 잽싸게 닦아내면 그만,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일상의 눈금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기분 좋은 삶은 ‘불편하지 않은 순간’이 아닌 ‘편안하고 안온한 순간’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이제 저는 목욕 직후에 수건을 바꾸기 이전의 일상에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행복의 순간을 느낍니다. 지친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 얼굴 위에 아이의 볼처럼 보드랍게 얹히는 감촉... 또 한가로운 주말 오후에 빨래를 갤 때도 뽀송뽀송 손안에 안기는 촉감 덕분에 살림이 더욱 즐거워집니다. 그렇듯 삶에 필수적인 순간은 아니지만 존재하면 확실한 위안을 주는 순간들, 바로 ‘조금 더 부드러운 물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 곁의 작은 위로입니다. 수건이라는 사물을 ‘물을 닦아내는 물건‘으로 바라보느냐, ’아침에 일어나 부드럽게 나를 깨우고, 저녁에는 나를 다정하게 감싸주는 물건‘으로 바라보느냐는 욕실이라는 공간에 깃드는 일상의 감각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수건은 어떤가요? 나의 일상을 톡톡히 부드럽게 달래주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