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일상이 진지해질 뻔했습니다.
만화책은 거의 읽지 않는 제가 유일하게 신권이 나오면 바로 달려가 소장하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와야마 야마 작가가 지금도 연재하고 있는 <여학교의 별> 시리즈인데요. 평범한 듯 어딘가 조금 엉뚱한 한 선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어느 여학교의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러운 일상 이야기입니다. 늘 황당한 포인트에서 웃음이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데서 기분이 좋아지는 매력이 있는 만화인데요. 처음 나오자마자 한 권씩 사 모아, 어느덧 3권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3권을 샀던 날, 그 길로 바로 찜해뒀던 카페에 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보냈습니다.
아, 역시 만화책은 여름방학의 낭만인 걸까요. 늦은 오후가 넘어가도록 따사롭게 들이치는 햇살, 얼음 동동 차가운 커피, 의자 밑으로 내린 다리 사이로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 농밀한 향 냄새, 에어컨 바람으로 인해 기분 좋게 서늘해진 의자와 책상... 일상의 속도가 빵 반죽 늘어나듯 쭈욱 늘어진 것 같은 오묘한 여름날에, 만화책은 딱 어울리는 장난감이었습니다. 처음 가 본 카페가 친숙한 내 방 침대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과 달리 만화책에는 어째서 빨리감기라든가 일시정지가 없는 걸까요! 오롯이 내가 눈으로 훑는 속도에 따라 인물이 말하고 장면이 바뀌는 풍경이 무척 무해해 기분이 몽롱해졌습니다. 모난 데 없는 한 입 크기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무는 딱 그런 느낌의 고양감이랄까요. 애니메이션이나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만화책만의 다정한 트랜지션이 잠시 멈춰 선 하루를 부드럽게 휘감았습니다.
원래 만화책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편인데요. 만화책보다 더 자극적인 애니메이션이 있고, 조용하게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유희로는 책이 있으니까요. 완전한 도파민도 그렇다고 완전한 교양도 얻어낼 수 없는 애매한 유희, 얼음이 다 녹아 어딘가 밍밍한 커피 같은 유희. 저에게 만화책은 늘 그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여학교의 별> 신권이 나올 때마다 오랜만에 만화책을 읽으면, 매일의 나날 속에서 의도적으로 또는 습관처럼 경계해 왔던 게으름의 미학을 느끼게 됩니다. 카페에서 만화책을 읽던 오후, 오랜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뭐랄까 난 내 인생이 되게 FM에 가깝고 유머라고는 부족하다고 느껴지는데, 그럴 때마다 이 만화책이 새로 나와서 가끔 읽어주면 피식, 하고 웃게 되는 게 있어. 그래서 분명 개그물인데 힐링이 돼”.
애매하기 때문에, 얼음 녹은 커피처럼 어딘가 밍밍한 맛이 있기 때문에, 엑설런트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순하디 달콤하지만 농밀하기 때문에. 오히려 만화책은 그렇게 사람을 무해하게 웃게 만드는구나 깨닫습니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소란스러운 화면 안에서, 나의 속도에 맞춰 칸을 넘나드는 상쾌한 박자감. 오직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카세트테이프를 트는 순간 인물들의 가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말풍선이 커졌다 작아지는 아날로그틱한 율동감. 정신을 빼앗긴 채 형형색색의 화면과 소리를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나 페이지 안 이곳저곳을 사뿐히 도약하기 힘든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뿐하고도 섬세한 유희, 그것이 만화책이 주는 매력이었습니다.
매일 진지한 책만 읽다가 가끔씩 만화책을 읽으면 일상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노트북을 욱여넣은 묵직한 서류 가방이 아닌, 알림장과 연필 한 자루 정도만 넣은 책가방의 무게 같다고 할까요. 평소에도 이 정도라면 딱 좋을 텐데요. 리프레쉬(refresh) 즉, 일상 속 환기의 핵심은 익숙한 무게나 리듬을 반전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만화책이야말로 아주 단순하게 일상의 무게감과 리듬감을 바꾸어 놓는 도구가 아닐까요? 게다가 잠시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 속으로 도망갈 수도 있게 해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최근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좋아했던 작품을 만화책으로도 즐겨볼까 하여 가끔 중고서점에 들르면 눈독을 들입니다. 그렇게 <여학교의 별> 외에 처음으로 <나츠메우인장> 28권을 사들고 온 날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는데요. 항상 애니메이션으로 보던 이야기를 만화책으로 읽으니 또 헤어 나오지 못하겠더군요. 새로운 일상의 유희를 찾은 것에 감사하는 요즘입니다. 휴, 하마터면 일상이 진지해질 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