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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손님, 기분은 방

호젓함을 호스트하세요

by 위시

가끔 혼자서 카페에 가서 기분 좋게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문득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서늘한 감정이 번집니다.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화난 것도 아닌, 몰래 찾아온 손님처럼 공손히 앉아 있는 이 감정이란 무엇일까요. 홀딱 젖은 물수건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는 듯한 기분이라기에는 건조함에 가깝고, 무겁기보다는 가벼운 감각입니다.


이런 기분이 드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나 봅니다. 지난 일요일,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요즘 회사에서 업무를 보다가 그런 '언짢은' 기분이 갑자기 조용하게 든다고요. "맞아, 나도 그런데!" 반가운 마음으로 맞장구를 치며 그렇구나, '언짢은' 기분인 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읽던 책에서 이런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호젓함'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그동안 호젓하다는 말은 어림짐작으로 해석하던 단어였는데 왜인지 그날따라 정확한 뜻이 궁금해졌습니다. 찾아보니 '매우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롭다'라는 뜻이더군요. 그걸 보자 '바로 이것'이라는 명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끔씩 아무 일도 없는데 별안간 찾아오는, 무겁기보다는 가볍고 슬프지도 화나지도 않은 밍밍하고 허한 기분. 바로 '호젓함'이라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감정을 곧잘 손님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고 손님을 위한 작은 방이 있습니다. 항상 문이 열려 있는 그 방에는 감정이란 손님이 별안간 들어와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곳곳을 휘젓고 다니다가, 잠시 낮잠을 자다가 또 홀연히 떠납니다. 그러면 저는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처럼, 머무는 기간도 성격도 제각각인 손님들을 한 발 떨어져 담담히 지켜봅니다. 홀딱 젖어 벌벌 떠는 손님에겐 담요를 건네주고, 땀을 뻘뻘 흘리는 손님에겐 부채질을 해주고, 햇볕을 만끽하고 싶은 손님을 위해서는 창문을 슬쩍 열어 줍니다. 대화가 필요한 손님과는 커피를 한 잔씩 내린 뒤 마주 보고 앉기도 합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잠시 마음이 소란스러워지지만, 이내 상냥한 마음으로 편안히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씁니다. "커피 한 잔 드실래요?", "방석에 앉으세요", "좋아하는 음악 틀어드릴까요?" 각 손님에 맞는 방식으로 기꺼이 방 안을 정돈합니다. 그렇게 방은 그때마다 다른 분위기가 됩니다. 볕이 깊숙이 들었다가 비가 오면 그늘이 드리워지고, 어떨 때는 재즈가 흐르고 팝송이 흐릅니다. 책상을 두기도 하고 꽃병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간 안에 감도는 분위기, 그것을 우리는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정을 한 가지 말로 정의내리며 내쫓을 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손님들이 찾아와 내 안의 작은 방을, 잠시 호젓하게 채우다 갈 뿐입니다. 우린 손님에게 매 순간 어떤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손님에게는 책 한 권과 따뜻한 커피를 내어줍니다. 그런 마음으로, 감정을 대하면서 기분을 내 손길로 만들어 갑니다. 호젓한 기분이 드는 날이면, 마음이 급하더라도 하려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좋아하는 것을 합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 손님이 모두, 나입니다. 그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친절을 베풀면 어떨까요? 호젓한 기분이 잦아지는 계절, 겨울입니다. 방을 빌려주는 마음으로, 오늘도 이불을 널고 물 한 잔을 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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