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을 낭만으로 바꾸는 의식
동이 채 뜨기 전, 아침 7시 반. 저는 서촌의 한 카페에 있었습니다. 연말을 며칠 앞둔 오늘, 아침 일찍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월간 음감회>는 작가 무과수의 책, 카페 네스트의 차, 수관기피의 곡 큐레이션으로 구성된 행사로, 월에 한 번씩 차를 마시며 한 시간 남짓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번 달의 주제는 ‘겨울의 낭만‘.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찾아가고, 겨울에 어울리는 딸기와 귤이 차곡차곡 쌓인 따뜻한 차이티 뱅쇼와 함께 구석의 테이블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창을 마주 보고 앉아 풍경 속에 푹 빠져 있자, 곧이어 잔잔한 음악이 꽃봉오리 터지듯 시작되었습니다.
분명 책도 읽고 일기도 쓸 심산이었건만, 겨울을 위해 준비된 고요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그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동트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치 아기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는 듯한 감각으로 음악에만 집중했습니다. 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풍요로운 감각을 헤아리는 데도 벅차,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마음이 살포시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책까지 꺼내 든다면 이미 충분히 따뜻한 코트 위에 패딩을 구태여 덧입는 느낌일 것만 같았습니다.
오직 음악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은 저에게 무척 드문 일입니다. 고작해야 어떤 행동을 할 때 음악을 ‘곁들이는’ 정도였습니다. 일기를 쓸 때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고, 달리기를 할 때 기운 솟게 하는 신나는 음악을 듣는 등 일상의 동작들에 ‘음악을 듣는다’는 행동을 추가하는 감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음악을 정말 듣고 싶은지 섬세하게 귀 기울여 살핀 적 없이, 하루하루 오감을 마구잡이로 조합해 지냈습니다. 오롯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시간과 공간, 더 나아가 마음을 쓰는 일은 없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저뿐은 아닌 모양인지, 이 모임의 메시지가 이렇습니다. “바쁜 일상 속 딱 한 시간만이라도 따뜻한 차와 함께 다정한 음악에만 감각을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어째서 하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욱여넣고자 하는 것일까요?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만 듣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책도 읽고 커피도 마셔야 합니다. 한 가지 일을 할 때 키링처럼 여러 가지 동작을 곁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알찬 일상을 보낸다고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단 한 가지 감각으로 나에게 필요한 순간을 디자인하고 큐레이션하는 힘이 빈약해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느 때보다 감각이 풍요로워진 시대이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오감 하나하나가 선사하는 깊고 세세한 감미로움을 헤아리는 법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기본이란 것은, 하나만으로도 풍요로운 것입니다. 옹골차게 꾸려진 하나의 무엇으로부터 선물처럼 딸려 오는 풍부한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롯이 만끽하는 생활이야말로 진정으로 알찬 생활이 아닐까요?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을 듣습니다. 밥을 먹을 땐 밥을 먹습니다. 오롯이 음악을 위한 순간을 마련합니다. 오롯이 식사를 위한 순간에 마음을 씁니다. 어떤 새로운 영감이 나의 일상에 소복소복 쌓일까요?
그동안에는 음악이 나의 시간과 공간, 마음을 대접했다면 오늘만큼은 내가 음악을 위해 시간과 공간, 마음을 쏟은 하루였습니다. 늘상 수단이었던 것이 어쩌다 목적이 될 때, 생활은 낭만이 되는 것 같습니다. 눈이 잠시 내렸다 녹듯, 오늘 저의 아침에도 겨울의 낭만이 잠시 왔다 갔습니다. 때로는 아침에 서둘러 출근 준비에 뛰어드는 대신, 지금 꼭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 오롯이 귀를 기울여 보는 시간을 뭉근히 가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