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지금 잘 쉬고 있나요? 이 질문은 나의 20대 인터뷰 문답집 <Hey,>의 7월호 질문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난 말하자면 여태껏 하루를 빈틈없이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은 나의 일상에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하루를 최대한 알차고 보람차게 살고 싶어 두세 가지 일을 스케줄에 다 욱여넣는 타입,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잠에 들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여태껏 그러한 루틴이 딱히 버겁지도 않았다.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부지런히 사는 나의 모습에 취해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빽빽한 수풀 같은 나의 일상에 바람 한 점 솔솔 통하는 여백을 두고 싶어 졌다. 노트북을 붙잡고 글을 쓰고 디자인을 하고 블로그를 하는 생산적인 일들로만 채워진 하루 말고, 잠깐이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쉼의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심한 편인 나에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라고만 정해두는 것은 무척 애매했다. 그보다 확실한 리추얼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쉼을 위한 나만의 리추얼, 일주일에 하루 노트북을 안 하는 날을 정하는 'NO트북 데이'를 소개한다. 나를 끊임없이 '일'하게 만드는 것은 노트북이라, 노트북만 없으면 강제 셧다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하는 날'보다 'NO트북 데이'라고 정해두면, 노트북만 안 하면 될 뿐이므로 전시를 보러 갈 수도 친구와 만날 수도 취미 생활을 할 수도 있어 시간 활용이 무척 자유로워진다. NO트북데이를 처음 실천한 7월 10일부터 4주간 네 번의 NO트북 데이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7월 10일 토요일
몇 달 전부터 저녁만 되면 눈이 너무 뿌옇고 침침해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루테인을 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별 소용이 없어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안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렌즈를 안 끼는데도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안구건조증이라고. 그래도 시신경은 아주 건강하다면서, 내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었다. 안구건조증은 완치가 안 되는,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질환이라지만 큰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점심을 먹고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을 읽었다. 회사에서 빌려온 책인데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좋은 책. 단락 전체가 훌륭해서 특별히 좋은 구절 하나만을 꼽기 힘들다. 평일에는 출퇴근할 때 틈틈이 책을 읽는데 감질맛이 난다. 주말만큼은 한 시간씩 진득이 책을 읽고 싶다. 노트북을 안 하니 시간이 널널해져 지루해질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
노트북을 안 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에 얼마나 노트북과 떨어진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는지 새삼 느꼈다. 비어버린 시간에 뭘 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정도라니. 무료하게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가 엄마가 내가 태어났을 때 써 준 오래된 편지 모음집을 정독했다.
그러다 낮잠을 자버렸다. 2시간이나. 게다가 몇 번이고 가위에 눌렸다. 일어났더니 4시. 아직 날은 밝은데... 역시 안 되겠다. 밖순이 기질이 발동했다. 평소 주말에 하루도 집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뼛속까지 밖순이인 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이렇게 힘든 법이다. 오늘만큼은 집에 붙어있자, 했던 다짐을 버리고 혼자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품샵과 독립서점으로 향했다.
연희동의 그로브와 글월, 도화동의 도화북스를 찾았다. 도화북스는 업무 상 인터뷰를 나눴던 적이 있던 곳. 오늘도 매니저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동안 사려고 벼르고 있던 책 <인디펜던트 워커>를 사고, 제로웨이스트를 주제로 책과 제품들을 큐레이션해 놓은 코너에서 친환경 설거지 비누와 수세미를 샀다. 외출하기 애매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마음이 조급했는데, 여름엔 해가 길어 5시부터 돌아다녀도 거뜬하다.
저녁을 먹고 겨울에 한창 좋아했던 일드 <코우노도리>를 오랜만에 재탕했다. 침대에 드러누워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보는 것은 나에게 정말 드문 일. NO트북 데이다 보니, 이런 여유도 생긴다. 드라마를 보고 오랜만에 화장실 대청소를 했다. 내일 동기들이 처음으로 내 자취방에 놀러 온다. 청소 후 개운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흰 우유를 마시며 아까 사 온 <인디펜던트 워커>를 읽었다.
7월 17일 토요일
회사 동료인 세음 씨가 멋진 글을 써 준 곳, 연남동의 디자이너 쇼룸 NTFU컬렉터블스를 예약 방문했다. 나 혼자 유유자적하게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영감의 온실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수집된 영감들과 곳곳의 작업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5시에 합정 미용실에 커트 예약을 해 놓았다. 합정에 갈 일이 생기면 항상 미리 가서 꼭 들르는 곳, 바로 종이잡지클럽. 대학생 때 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던 만큼 애정이 깊은 곳이다. 영감이 폭포수처럼 필요할 때 찾는다. 온갖 매거진이 모여 있어, 그때그때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매거진들을 읽고 영감을 수집한다. 스벅 자몽허니블랙티를 처음 먹어봤다. 처음엔 '웩' 싶었는데, 먹다 보니 중독성이 있어, 가끔씩 생각난다.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한 방에 똑단발로 싹둑! 태슬컷이라고 한다. 방에 머리카락이 너무 많아 진절머리가 나서 확 잘라버렸다. 워낙 머리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이라 아쉬운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이 속 시원하기만 하다.
이번 주부터 오랜만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정말 얼마만이지. 색연필을 들고서 그린 두 번째 그림은 흰쌀밥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 역시 그림은 취미로 해야 재밌다. 그림 그리는 게 힐링이 되는 날이 다시 오다니. 당분간 그리는 그림은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 <오늘의 기본>에 쓰이게 될 이미지가 될 것이다.
동기 서현이한테 추천받은 영화 <러브 인 프로방스>를 조금 보다가 (원래 영화 하나를 앉은자리에서 다 보지 못하는 타입) 왓챠에서 너무 취향인 영화를 발견했다. <고양이와 할아버지>. 나중에 바라는 노년의 삶이 딱 이런 모습이다. 간만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영화 두 편이었다. NO트북 데이여야 겨우 영화나 드라마를 진득이 누워서 보는구나...
7월 24일 토요일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침대에서 바로 나오지 못하고 습관처럼 세븐틴을 덕질하다가 겨우 몸을 이끌고 나와서 차린 조촐한 점심. 냉장고에 든 게 별로 없었다. 그 가운데 비엔나는 나의 구원자. 늦게 일어난 날은 마음이 바쁘다. 이곳저곳을 바삐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만화&그림책 중심 독립서점 PRNT에 갔다. 마침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안유진 작가의 개인전 <걷지 말고 헤엄칠까요>가 열려서 겸사겸사.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알차고 재밌는 공간이었다. 사실 나는 그림책이나 만화책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있는데도 흥미를 끄는 책들이 많았다. 특히나 요즘 일본에서 인기라는 <빠졌어, 너에게>를 사서 하루 만에 다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안유진 작가의 그림들은 몽글몽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어릴 적 묻어놓은 타임캡슐을 연 듯한 기분으로 마주하게 되는 그림들이다. 방콕 열대어 시장에 갔다 온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어, 나도 함께 방콕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상도동에서 압구정 쪽으로 이동.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모스가든에서 리빙 제품이랑 패브릭 소품들을 둘러보고 클레어스 서울에서 열리는 루시드 아일랜드 팝업 전시에 갔다. 명상을 주제로 한 이번 협업 전시에서는 마인드 웰니스 앱 루시드 아일랜드가 제안하는 명상 가이드를 들으며 10분간 명상을 체험해 볼 수 있다. 한 달 후 나에게 쓰는 편지도 쓰고, 명상을 주제로 큐레이션 된 책도 읽을 수 있다. 덕분에 명상이 한결 친근하게 느껴져 이날 이후 매일 밤 자기 전 명상을 실천하는 중. 정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입구 녹두거리에 가서 11년 지기 친구 란이를 만났다. 란이가 서울에 올라오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서로 바빠서 겨우 만났다. 친절하고 유쾌하신 사장님 부부 덕분에 저녁 식사를 아주 즐겁고 맛있게 즐겼다. 장수 막걸리까지 더하니 천국이 따로 없다. 역시 친한 친구와 기울이는 술이 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7월 31일 토요일
일어나자마자 차를 마시며 무과수 작가님의 <안녕한, 가>를 느긋하게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일상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과 닮아서, 작가님의 삶은 나와 주파수가 참 잘 맞는구나 싶다. 요즘 날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었는데, 작가님의 가을과 겨울 일상을 천천히 들여다보다 보니 여름을 잘 떠나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용감하게 맞이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설렘이 생겼다. 요즘 주말엔 차를 자주 마신다. 차를 마시는 순간에는 언제나 한 발 빼는 여유가 있다. 입에 한 모금 넘기기 전 찰나에 코끝을 스치는 향, 돌진하듯 꿀꺽꿀꺽 마실 땐 맡을 수 없는 그 향은 잠시 멈춰야만 느낄 수 있다. 잠깐 멈춤. 그리고 음미하기. 모든 일에 그렇게 다가가고 싶다.
오늘도 조촐한 점심. 주말 점심만큼은 느긋이 정성 들여 근사한 요리를 해 먹고 싶은데 항상 마음이 바빠 서두르게 된다. (오늘 하루도 돌아다니고 싶은 곳들이 많아서...) 요즘따라 냉장고가 텅 비어, 이날은 밥도 없길래 계란 프라이와 비엔나로 해결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랑 똑같네. 그리고 조금 남은 된장국.
문화역서울284에서 진행 중인 <함창으로부터 명주로부터> 전시. 경북 상주 함창에서 대를 이어 명주를 만드는 허호 장인과 협업해 '로부터robuter'가 선보이는 전시다. 나중에 지역 곳곳의 좋은 전통과 물건을 소개하는, 이른바 한국형 디앤디파트먼트 같은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는 나는 요즘 전통 소재에 대한 관심이 많다.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좋았던 전시. 이 전시를 통해 내가 만들고 싶은 브랜드를 구체화하는데 엄청 많은 인사이트를 얻어서, 이날은 자기 전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온라인 워크숍도 신청했다.
문화역서울284에 간 김에 근처에 한 번쯤 들러보고 싶었던 '레디투웰니스'와 '서스테인어블해빗'에 들른 뒤, 오늘의 최종 목적지 DDP UD라이브러리를 찾았다. 저번 주 일요일에 <UD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전시를 보다 발견한 곳인데,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 온전히 시간 내서 다시 오고 싶었다. 요즘은 지역과 함께하는 삶이라든가 좋은 공예, 전통 물건 등에 관심이 많아서 골라 읽은 책들도 다 그런 책들. 빌려갈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 내내 자기 전까지 내가 어떤 브랜드를 차리고 싶은지, 어떤 인사이트가 필요한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콘텐츠를 올리고 디자인을 하는 것만이 하루를 가장 생산적으로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동안이 무색할 정도로, NO트북 데이의 일상은 온갖 즐거움과 인사이트로 넘쳐난다. 노트북이 있어야만 최대한 많은 세상과 자유롭게 연결되며 오늘도 알차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노트북을 벗어나니 일상 주변의 다양하고 재밌는 것들을 즐기며 훨씬 다채로운 영감 수집의 삶을 살고 있다. 노트북이 없는 날 = 하루를 보람 없이 보내는 날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쉬고 싶은 사람인지 더 알아가는 날이다.
나의 모든 생산적인 일과 작업은 노트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나에게 있어 쉼을 위한 루틴은 'NO트북 데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어 잠시 꺼두어야 할 대상이 꼭 노트북일 필요는 없다. 각자 자신의 일상에 말뚝처럼 박혀 나를 좀처럼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이라도 잠시 차단하는 루틴에 도전해 볼 수 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새롭게 얻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