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계절감을 새기다, 두 번째 계절 여름
계절 큐레이션 제2편, 여름
마침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이 왔다. 계절 큐레이션 1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계절감'이 가장 뚜렷하다는 데 있다. 극단적인 더위와 습도, 귀를 파고드는 매미와 풀벌레의 소리, 산뜻하다 못해 맹렬한 햇빛, 대지로부터 스몰스몰 풍겨오는 풍부한 자연의 냄새. 그러나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깃든 수렁들. 석쇠에 누워 달궈지면 쇠의 결이 그대로 남아 타버리는 것처럼,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오면 훈장이나 상흔처럼 내 마음에 새겨지고 각인되는 뚜렷한 계절감이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좀처럼 계절을 만끽하기 어렵다. 회사에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면서 할 일에 치여 살거나 실내에 갇혀 있으며, 무엇보다 계절이 오고 자연물이 생동하는 현상을 주변 배경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 일일이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과는 별개로 계절은 묵묵히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른 색감과 다른 냄새와 다른 소리들을 안고 찾아온다. 그 계절에 다이빙하듯 한껏 뛰어들어 우리의 일상도 한껏 물들어 봐도 좋지 않을까? 내 일상에 계절을 녹여낼 수 있는 나만의 카테고리를 정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카테고리들에 '계절다운' 변화를 주는 것이다.
계절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계절감이라는 것은 계절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다. 그러니 이 감각을 조화롭게 자극해주면 계절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풍부한 무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감 중 자신의 취향과 성향에 맞게 조금 더 집중하고 싶은 감각에 주목해 보는 것도 좋다.
그리하여 계절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 계절에 어울리는 나만의 카테고리로 일상을 색다르게 꾸며보는 '계절 큐레이션' 리추얼을 소개한다. '봄'편에 이은 '여름' 편으로 돌아왔다, 여름을 만끽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내가 제안하는 계절 큐레이션 카테고리와 함께, 여름을 맞아 각 카테고리 별로 변화를 주거나 실행한 일상의 모습을 공유한다.
계절 큐레이션 (1) - '봄' 편 보러 가기
1. 한결 가볍고 여름스러운 집 단장
여름을 맞아 한결 선선하고 가벼운 분위기로 집을 단장했다. 따뜻하고 화사한 느낌이었던 봄의 인테리어와는 달리 여름의 무성한 녹음과 닿아있는 푸른 녹색의 컬러들이 눈에 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면서 한결 단정하고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이 생긴 터라, 자연스레 벽의 포스터와 엽서들을 걷어내고 책상 위도 정리해 방 안이 훨씬 간결해졌다. 언뜻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려 노력한 흔적이 담긴 방이다. 눅눅하고 더운 여름엔 집기들을 어지럽게 놓아 정신을 사납게 하면 안 된다. 공간을 홀가분히 유지해야 마음도 그 안에서 안정을 찾게 되는 법. 패브릭은 겨울부터 쓰던 것이지만 색감이 여름과 조화를 이루어 다시 꺼냈다. 글을 쓰는 지금은 패브릭도 걷어내어 본연의 흰 테이블과 마주하고 있다.
2. 침구 바꾸기
겨울부터 봄까지 내내 사용하던 머스터드 색깔의 베갯잇과 이불을 장롱에 넣고, 깔끔한 흰색 침구를 들였다. 덕분에 잠자리가 더워 보이지 않고 한결 시원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베개 커버는 천연섬유인 광목 소재로 마련한 덕에 인공적인 느낌이 덜하고 일상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불도 부드럽고 가벼워 살결이 닿는 느낌이 산뜻하고, 열대야에도 나를 옥죄지 않는다. 침구만 계절에 맞게 바꾸어도 방의 분위기와 무게감이 달라진다.
3. 산, 책
여름엔 역시 생명력이 감도는 울창한 녹음을 마주하러 산에 오르는 게 가장 기대된다.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는 마음처럼 산을 찾지 못하지만, 6월이라면 아직은 선선함이 감돈다. 신록에서 성숙해져 가는 단계의 빛깔을 품은 나뭇잎들을 감상할 수 있다. 주말마다 집 근처의 산을 올라 초록빛 풍경을 한껏 눈에 담고, '산, 책'이라는 이름으로 사색의 기록을 남긴다.
4. 저녁 산책
여름의 묘미는 역시 낮을 갈무리하는 저녁 산책 아닐까. 한층 밀도 있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눅눅한 지면의 냄새, 하천의 물비린내 등 한층 풍부한 자연의 감각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7월로 접어들며 저녁에도 30도를 웃돌고 있지만, 해가 진 이후라 낮만큼 덥진 않다. 물론 여전히 열기가 감돌지만 여름의 산책에 따라붙는 필연적인 후덥지근함 따위야, 피하기보다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떠안고 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여름밤' 감성이 있는 게 아니니. 좋아하는 여름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한가로운 여름밤을 만끽해 보자.
5. 부채 장만
여름을 맞이해 부채를 장만했다. 각종 전자기기와 친하지 않은 구시대적 성향을 가진 나는 선풍기 대신 부채질을 하는 일이 더 잦다. 단순히 자취방에 선풍기가 없는 까닭도 있지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가르는 소리가 선명한 결로 다가오는 점이 부채질만의 매력이다. 사진 속 부채는 남원 최수봉 장인의 부채로, 디앤디파트먼트에서 소개하는 우리나라의 로컬 제품이다. 평소 로컬의 제품에 관심이 많은 내 마음에 쏙 다가왔던 부채. 너무 하얗지도 않고 너무 반듯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멋을 자랑한다. 좋은 부채는 어딘가에 무심히 툭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테리어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6. 식물
여름 감성을 조성하는 데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푸르른 식물들이다. 나는 지금 세계, 평화, 천하, 태평, 소란 다섯 친구들과 살고 있다. 사진 속 빨래 건조대 앞의 가장 큰 홍콩 야자가 우리 집에 가장 먼저 들인 평화, 그리고 세계, 천하, 태평은 하나의 아이비에서 분리시켜 세 병에 나눠 심은 세 쌍둥이다. 봄에는 천하, 태평 둘로만 나눴는데 레스토랑에서 음료를 먹고 난 빈 병이 예뻐서 집에 가져온 후 또 하나를 나눠 심었다. 세계는 동기 친구가 지어준 이름. 그리고 소란은 친구가 선물해 준, 연약한 줄기와 가는 잎이 매력 있는 아스파라거스다. 여름이 오고서 온전히 새로 들인 식물은 없지만, 세계는 여름에 새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는 법! 여름을 맞아 원래 행잉 플랜트를 들이려 했으나, 식물에 점점 애정이 가는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거두거나 내치지 않고 신중히 대하게 된다. 여름이 가기 전에 새로운 친구를 또 들일지는 아직 미지수.
7. 티타임
여름이 된 후 부쩍 집 안에서 커피보다 차를 즐기는 시간이 늘었다. 집의 분위기가 간결하고 소박해진 탓일까, 고요하고 잔잔한 쉼의 시간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차가 끌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활수집에서 데려 온 작은 찻잔이 감성을 더해준다. 무더운 바깥이지만 방 안에서 뜨거운 차를 감미하며 소소한 이열치열의 법칙을 실감한다. 계절마다 유난히 찾고 싶어지는 음료가 있는 법. 아직 이르지만, 겨울을 생각하니 그때 가서는 따뜻한 코코아를 많이 타 먹게 될지도.
8. 여름 감성 포스터
방 안 곳곳에 자리한 여름 감성의 포스터. 포스터는 따로 구매하기보다 가지고 있는 매거진이나 책에서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뜯어내 사용한다. 누군가가 호숫가에서 수영하는 모습이 담긴 포스터는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거울 옆의 사진은 <예진문의 취미기록>에서 가져왔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엽서는 19년도 여름 도쿄에서, 해변가 사진은 성수낙낙에서 열렸던 세가방 팝업 스토어에서 구매한 6월 달력이다. 여름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이미지를 군데군데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9. 향
봄에는 한창 교토 훈옥당의 '다이고의 벚꽃'이라는 향을 피웠다. 확실히 여름이 되니 계절감에 맞지 않게 포근하고 산뜻한 느낌이 강해, 요즘은 18년도 일본 오사카에 가서 직접 사 왔던 교토 코사이도의 '나고미' 향을 주로 피우고 있다. 훨씬 워터리하고 푸르른 느낌의 향이라 절로 선선한 여름의 기운이 피어오른다.
10. 여름 플레이리스트
여름 처돌이인 나는 듣기만 하면 나의 지난 여름들이 자동 재생되는 '여름 감성 플레이리스트'가 압도적으로 많다. 주로 (코로나 이전까지) 여름마다 일본에 가서 들었던 노래들, 19년도 여름에 브루클린에서 들었던 'Brooklyn In The Summer'은 아직도 브루클린의 냄새가 짙고, 20년도 여름 제주도에서 한창 들었던 오연준 버전의 '제주도의 푸른 밤', 내가 좋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름 배경 영화의 OST, <너의 이름은>이나 <날씨의 아이> 등 여름을 배경으로 한 신카이 마코토 영화 OST, 그리고 18년도 여름에 엄마와 같이 보고 친구들과 후유증을 즐겼던 영화 <맘마미아>의 청량한 OST, <Call Me By Your Name> OST 등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의 플레이리스트는 나의 여름 내내 함께 했거나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의 OST들이 많다. 이 노래들을 들으면 여름의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1편에서도 언급했듯 계절감을 느끼는 건 단순히 아, 여름이다~ 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함께 걸어가기 위함이다. 계절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다 보면 금방 한 달이 가고, 반년이 가고 1년이 지난다. 시간이 마치 나의 멱살을 끌고 가는 것 같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시간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들여다 보고, 시간의 흐름이 주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 녹아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만끽해 봐야 한다. 분명 계절을 의식하는 일상과 그렇지 않은 일상은 다를 것이다. 비유하면 '필터' 같은 거다. 별 볼 일 없는 사진에 필터를 끼얹으면 세상이 달라 보이듯, 우리의 일상에 '계절감'이라는 필터를 씌워보자.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난 지금도 한창 여름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