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랑 둘이 왔어요.
"특히 나는 대체로 혼자 여행을 떠나 시간이 넘친다. 그러니 가져간 책은 마치 함께 여행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그 책이 나에게(혹은 여행하는 장소에) 맞지 않으면 약간 비참한 기분이 든다. 방대한 시간,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불안과 고독이 뒤섞인 기분을 계속 질질 끌고 가게 된다.
- 카쿠타 미쓰요 <보통의 책읽기> 중에서
어딜 가나 거울보다는 책, 립스틱보다는 연필을 들고 다니는 나는 여행을 갈 때도 예외 없이 책을 두세 권 들고 간다. 주로 뚜벅이 여행을 하는 탓에 긴 시간 버스를 타야 할 때 꺼내 읽고, 카페 찾아다니는 걸 좋아해 카페라떼와 함께 읽을 책도 필요하다. 자기 전에는 시원한 이불 위에 엎드려 읽는 것이 하루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묘미다.
20년도 여름에는 제주의 '소심한책방'에서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을 사서 근처 카페 모뉴에트에서도 읽고 여행 내내 들고 다녔다. 그땐 몰랐는데 1년이 지나 그 책을 다시 꺼내보니, 읽는 문장마다 사이사이 행간마다 그때의 제주도에서의 기억이 묻어났다. 다시 제주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끼며 그리움에 잠겼다. 여행 내내 함께했던 책은, 후에 그 여행을 추억하고 복기하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2016년 allure 인터뷰에서 배우 정유미가 한 말이다. "해외여행 갈 때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향수를 꼭 하나씩 사요. 그리곤 여행 내내 그곳에서 산 향수만 뿌리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서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정유미에게 있어 향수가, 나에게는 책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 가면 그 현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구매해 여행 내내 읽는 리추얼 '책, 크인'을 소개한다. 평소 표지만 보고 지나쳤던 책도 희한하게 여행지에서는 시선에 꽂히는 일도 생긴다. 여행을 떠나서 숙소에 체크인하듯, 서점에 들러 '책, 크인'을 해보자. 여행 내내 함께한 책은 촬영한 사진이나 밤마다 끄적인 일기보다 더욱 특별한 추억을 고이고이 간직해 줄 것이다.
2020년 여름 제주도 : 김신회 <아무튼, 여름>
2020년 여름의 제주도 여행을 함께 했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 종달리의 '소심한책방'에서 구매 후 바로 옆 카페 '모뉴에트'에서 유유자적 카페라떼를 마시며 읽었다. 사실 일주일 제주도를 여행하며 여러 군데의 독립서점을 방문했고 다수의 책을 샀지만, 온전히 '책, 크인' 한 듯한 책은 바로 이 책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계절을 이야기하고 있어서였을까. 이전에 매대에서 여러 번 보고도 지나쳤던 책인데도, 소심한책방에서 다시 한번 마주쳤을 땐 불가항력으로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여름의 한 복판에서 여행 중인 나에게 여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고 공감이 갔다. 무엇보다 위에서 인용한 카쿠타 미쓰요의 <보통의 책읽기>의 구절도 바로 이 <아무튼, 여름>에 언급된 구절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여름과 김신회 작가가 즐기고 있는 여름을 비교해보며 계절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여름은 담대하고, 뜨겁고, 즉흥적이고, 빠르고, 그러면서도 느긋하고 너그럽게 나를 지켜봐 준다."
<아무튼, 여름> 14p
2021 여름 제주도 : 한정원 <시와 산책>,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 이별 여행'을 갈 작정이었다. 사계절 중 여름을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나는 7월 중순 경부터 여름이 끝나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자주 우울하고 서운해졌다. 하지만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여름은 순리대로 잘 보내줘야 하는 법. 여름을 향한 상실감을 위로하고 가을이라는 새로운 계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 '여름을 잘 떠나보내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8월의 마지막 주에 근 1년 만에 제주도로 떠났다.
하도리-종달리 부근에서만 돌아다닐 계획이었던 내가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찾은 곳은 '종달리746'. 그곳에서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을 발견했다. 사실 제주도로 떠나오기 전 서울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으나 지나쳤던 책. 그러나 여행지에 가면, 이때가 타이밍이라는 듯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손짓하는 책이 있다.
"내일은 뭐지?" "영원 그리고 하루."
<시와 산책> 71p
하루를 또 한 번 건너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누가 사과를 베어 먹듯 한 입씩 사라지고, 나의 주변의 것들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변화한다고 느끼던 때. 책 속의 이 구절은 나에게 퐁당 돌을 던지듯 선명한 울림을 주었다. 내일은 그냥 또 '하루'이고, 그리고 시작과 끝을 가늠하거나 계산할 수 없는 그냥 관념적인 시간일 뿐. 뭔가가 내일이 되고 자정이 지났다고 혹 떼이듯 앗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여름 이별 여행을 떠나온 나에게 '이별할 실체도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적인 위로를 건네는 문장이었다.
두 번째 날 오후, 비자림에 갔다가 다시 종달리로 돌아와서 카페 책자국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일단 제목에 '여름'이 있어서 불가항력으로 집어 들었던 것이 첫 번째, 나도 이 '여름 이별 여행'에서 배워가는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펼쳐 본 게 두 번째, 훑다가 꽂힌 한 구절을 지나칠 수 없어서 사고만 게 세 번째, 그런 연유로 이 책은 나의 여행 중반쯤 찾아왔다.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열과> 중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엔 나도 내가 건너온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혹은 말할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감으로써 저절로 내 안에서도 흘러갔던 것도 있는가 하면, 끝끝내 놓지 않으려다 보내야만 했던 것(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걸 알았던 것)들도 있다. 그게 뭔지 각각 헤아려보면, 그것들을 각각 어떠한 방법으로 잘 보내줄지 명쾌히 알게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여름을 어떻게 잘 보내줄 수 있을지 이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것 같았다. 다른 때도 아니고 딱 이곳에서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마음에 저장하고 추억으로 기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진을 찍거나 일기를 쓰거나. 그것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풍경들을 정성껏 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책에는 나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바라본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세계를 다시 한번 나의 시선, 그리고 여행이라는 일상 속 특별한 필터로 다시 한번 투영해 바라보게 된다. 그 안에는 활자에서는 볼 수 없던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책, 크인'은 물리적으로 어떤 동네를 여행하는 동시에, 책 속에 담긴 무형의 세계로의 여정도 같이 떠나는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탐험했던 겹겹이 부푼 세상과 숙소든 관광지든 버스든 비행기든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늘 따라다녔던 책. 그것들은 여행 이후에도 나의 공간에 그때의 온도와 냄새를 띄며 남아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고개를 돌려 책꽂이를 바라보면 나의 제주 여행을 함께했던 책들이 있다. 책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펼쳤던 서늘했던 숙소의 여름밤, 카페에서 흐르던 평화로운 음악, 가방에서 느껴지던 한 권의 무게 등의 감각이 다시금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여러 번의 '책, 크인'이 쌓이면 나만의 '여행 컬렉션'을 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남들의 사진첩에도 다 찍혀있을 똑같은 풍경의 제주가 아닌, 나만이 바라보고 발을 내디뎠던 세계가 아카이빙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