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도쿄러와 뉴요커 되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다

by 위시

"패슨 유얼 싯 밸트, 낫 폴 유어 세이프티 벗 드림스"

(Pasten your seat belt, Not for you saftey but dreams)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승무원의 안냇말. 난 일어나자마자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사랑하는 도시들에 랜딩한다. 어휴, 도쿄에 갔다가 뉴욕에 가는 이 바쁘지만 간지나는 커리어우먼의 삶이란! (반짝이는 이모티콘).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마시고ㅡ거짓말이다, 내 방엔 커피머신이 없으므로ㅡ, 천으로 된 백을 매고 햇살을 즐기러 나간다. 이는 모두 상상, 그러나 지연된 현실.


이미 이룬 것처럼 행동하고 느껴라. 그 말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믿었다. 정확히는 사랑에 빠졌다. 그걸 세련된 언어로는 '시각화'라고 하고 간혹 영미권 영상에서는 'menifesting'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아무렴 좋다. 초등학생 때는 한창 'R=VD'라고 해서 꼭 앙큼한 '별' 이모티콘ㅡ그것도 칠해지지 않은, 윤곽선으로만 그려야 간지ㅡ과 함께 꿈을 적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그런 낭만적인 소꾸(소원 꾸미기)에 가장 푹 빠져있던 시기는 론다 번의 '시크릿(The Secret)'이라는 책을 맹신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시기 유명한 서울권 대학 로고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나의 스터디플래너에 대문짝만하게 적었던 나의 R=VD는 이러했다. 첫 번째는 '홍대 합격!!' (느낌표 두 개), 두 번째는 '권순영과 결혼한다'. 이 과몰입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믿는 마음이래서, 그 지시를 아주 충실히 따랐다. 돌이켜 보면 조금 미친 짓이었지만 난 보란듯이 첫 번째 꿈을 이뤄냈고, 두 번째는 어른이 되고서 비혼을 선언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순영 씨는 나의 낭만에 이용당한 셈인데, 미안해... 그렇지만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너와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형...(이라는 말은 하지 말까?)


아무튼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이미 이룬 것처럼 행동하고 느끼라는 그 말이 요즘의 날 하루 동안에도 뉴욕에 갔다가 도쿄에 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난 홍대 근처에 사는 도쿄러이자 뉴요커인 셈. 이런 바쁜 이국 생활을 번갈아 한 지는 꽤 됐다,고 누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선글라스를 치켜 올리며 뻔뻔스럽게 말할 것이다. 도쿄에 사는 건 벌써 13년째 마음에 품어 온ㅡ이정도면 진즉 발효되었을 것 같은ㅡ나의 가장 오래된 꿈인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망했다. 그게 꽤나 좌절스러웠던 모양인지, 원래는 일도 하고 경력도 쌓으면서 눌러 앉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오기가 생겨서 되려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요상한 괴물의 목을 애매하게 따버리면, 절단된 단면이 꿈틀거리며 지들끼리 붙다가 급기야 화염병을 맞아도 죽지 않는 더 막강한 괴물로 변신하게 되는 것처럼ㅡ얼마 전까지 넷플릭스 SF호러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에 푹 빠져 있어서 비유가 이따구인 점을 양해 부탁한다ㅡ나의 꿈이 그랬다. 무시무시한 녀석. 내가 이런 놈을 키우고 있었다니. 어쨌든 서울에 살면서도 이미 도쿄에 살고 있는 것처럼 군 지도 몇 년 되었다. 이미 꿈이 이루어 진 것처럼 행동하고 느끼면, 정말로 이루어진대서. 서울에서 도쿄러가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목록들이 있다.


- 공항철도를 타면 전광판에 일본어로 재생되는 안내 문구와 뉴스 자막 따위를 찍는다. SNS에 인증샷을 올리면 누군가는 내가 일본여행 간 줄 안다. (실제로 그런 DM이 왔다)

- 사사키 이사오(Isaki Sasao)의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서 한적하고 단정한 거리를 걷는다. 순식간에 일본의 다이칸야마 거리에 와 있다. 가장 찰떡인 음악은 'Sky Walker'와 'Butterfly In The Rain'.

- 어스름이 찾아 오는 저녁 무렵엔 일본 감성이 물씬 나는 영화나 드라마의 bgm을 틀어 놓고 여유롭게 식사 준비를 한다. 추천하는 플레이리스트는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 오기가미 나오코의 <안경>의 ost.

- 샤워할 때나 설거지 할 때, 자기 전 같은 때에 일본의 심야 라디오 비스무리한 것을 듣는다.

- 일본의 남자아이돌 '나니와단시'의 예능을 볼 때면, 가끔 못 알아듣는 유머가 나와도 알아들은 척 같이 웃는다.

- 유서 깊은 교토의 향 브랜드 훈옥당의 향을 켜 놓고 책을 읽는다. 가끔 일본에서 사온 찻잎으로 차를 우려마신다. (찻잎이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 저녁 산책을 할 때는 일상과 비일상이 버무려진 흥미진진한 도쿄의 밤이 연상되는 감각적인 음악을 듣는다. 추천하는 아티스트는 요네즈 켄시와 오피셜히게단디즘.

- 일본 청춘 하이틴 만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다면 H(세모 이모티콘)G의 노래.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 평범한 주민에 빙의하고 싶으면 호시노 겐이나 쿠루리(Quruli). 여기서 시티팝스러운 느낌을 살짝 가미하고 싶다면 키린지(Kirinji).

-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는 일본어로 리액션 한다. 마치 일본 친구와 함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저녁엔 기린이찌방 캔맥주(아사히도 좋지만 내 취향은 기린)를 마시며, 일과를 다 마치고 나만의 1LDK 요새에서 자기 전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외노자(?)에 빙의한다.

- 자칭 타칭 일본 감성이라 어필하는 카페에 가서 분위기에 실컷 취한다.

- 일본어 공부도 할 겸, 일본어로 된 원서를 읽는다.

- 도쿄 JR 야마노테선 안내음 asmr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한다.


이쯤되면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컨셉충으로 각인돼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누가 뭐라건 틈날 때마다 이 놀이를 즐기고 있다. 가고 싶은 도시가 추가될 때마다 일상을 또 다른 버전으로 큐레이션(?)하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그런 내가 두 번째로 꽂힌 도시가 뉴욕이다. 전에 실제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당시엔 살으래도 못 살겠다고 진절머리를 쳤는데 그 후로 줄곧 생각했다. 뉴욕을 한 번 제대로 삶에 들여 본 사람은 그 어떤 도시도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뉴욕을 시작으로 세계 어디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글로벌 시대에 기대 나의 꿈은 그렇게 증식해 간다. 어마어마한 속도와 집념으로. 그렇게 시작된 뉴요커 놀이. 아직 뉴요커 경력은 고작 몇 달 밖에 되지 않아 내공은 좀 부족하지만.


- 경의선 숲길을 걸으며 센트럴파크를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연트럴파크'...)

- 뉴욕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재즈를 들으며, 뉴욕을 배경으로 하거나 뉴욕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을 읽는다.

- 유쾌한 미드 오프닝에 흘러나올 법한 신나는 ost를 들으며 번화가를 활보한다. 최근에 빠진 곡은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랑 'Should I Stay of Should I Go'. 뉴욕(인 척 하는 서울의 빌딩숲)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사건들을 만나러 흥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에 빙의할 수 있다.

- 공원의 벤치에 앉아 빵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헤드폰을 끼면 더욱 간지난다. (없지만)

-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과시하는 민소매를 자주 입는다.

- 혼자 있을 때 욕을 영어로 한다. 대밋, 홀리 쉿, 애스홀, f퍽, 스크류잇! 한동안 미드에 빠져 살면 저절로 나온다.

- 영어로 일기를 쓰거나 영어로 된 원서를 읽는다.

- 뉴욕을 애찬하는 노래들을 듣는다. 그러니까 제목에 '뉴욕'이 들어간 것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에드 시런의 'New York'과 엘리샤 키스의 'Empire State Of Mind'.

- 뉴욕 브이로거의 영상 속 장소를 보며, 언젠가 내가 앉아있을 모습을 상상한다.

- 운동복 입고 집 앞 공원에 아침 조깅하러 가기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 시도할 수 없는 목록)

- 그래놀라 요거트와 과일 스무디로 건강하게 시작하는 'THAT GIRL'식의 아침!은 아직...


이렇게 서울에 살면서 도쿄러가 되고 뉴요커가 되는 생활은 아무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로 아무나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도쿄의 골목을 걷고 뉴욕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하루에도 전 세계를 누비는 특권은 누릴 수 없다.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낭만, 되리라는 확신, 되도록 하겠다는 집념. 이 3종 세트를 요하는 매우 정교한 일이다. 누군가는 참으로 정성스럽고 우습다고 하겠지만. 피카소는 말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다."

(Everything I can imagine is real)


그 말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내가 25년이나 살아 더 큰 꿈을 꾼다. 흰 도화지에서 전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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