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모을

좋아하고, 가 아닌 좋아지는 것은 자격이라고.

by 위시

한 달 만에 다시 모을에 왔다. 벌써 7월의 끝자락. 미숫가루에 물 세 스푼 정도 탄 것만 같은 밍밍한 농도의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햇빛이 침전시킨 듯한 빛바랜 누런 가루들이 까슬까슬 씹히는 나날. 흘리고 닦지 않은 채 방치해 두어 끈적끈적해진 마루를 걷는 듯한 시계침. 잠들지 못하는 새벽녘 밝아오는 여명에만 의지해 눈 감고 이불 덮는 아침. 이런 식으로 어느 현상을, 하루를, 감정을 어떤 음료에 빗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음료가 놓인 테이블은 낭만적이고, 감칠맛 나고, 내게 영양을 주니까. 옛날에 한 번은 목성을 카페라떼에 빗대어 표현한 적이 있다. 아직 완결짓지 못한 나의 소설에서. 우주의 목성. 뭐라 했지. 기억이 안나서 잠시 거들떠 보고 온다. 생동하는 목성, 따위의 문장을 썼던 것 같은데. 찾아 보니 생동하는, 양 옆으로 괄호를 썼다.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했다는 거겠지. 아니면 정반대로 생략해도 상관 없을만큼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지도. 얼음이 부딪힐 때 나는 사그랑사그랑거리는 소리가 난 지구가 자전 또는 공전하는 소리와 닮았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고, 그런 상상을 즐겼다. 모든 현상에, 하루에, 감정에 어울리는 소리를 찾는 것은 재미있다. 그걸 유난히 잘하는 작가가 있는데, 난 그 작가를 존경하고 좋아해서 많이 닮고 싶다. 그녀를 닮되, 그녀의 글과 닮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아무쪼록 8월은 좀 더 막걸리 같이 톡 쏘면서 짭짤한 맛이 있거나, 매실청처럼 혀가 번쩍일 정도로 시큼한...그런 류의 하루들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보내야 할까. 어떻게 지내야 할까. 일단 아침에 일어나야겠지. 초록을 좀 더 자주 보고, 물건을 덜 사고, 가벼운 음식을 먹고, 매미 소리를 좀 더 많이 과하게 듣고 싶다. 그리고 운동...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까 모을에 오는 길에 산 옥빛 얼룩이 진 버섯향로로 향을 잔뜩 피워야겠다. 과한 소비를 한 탓에 마음은 편치 않지만, 생각해 보니 1년 동안 열심히 책을 집필한 것에 대한 보상을 아직 스스로 주지 않았구나 싶어 이것 또한 나를 위한 선물인 셈 치기로 했다. 그런만큼 더욱 열심히 향을 피워야지. 내가 그동안 쓰고 버린 페이지를 한데 모아 태우는 것처럼 장렬히 동시에 홀가분히. 나의 몸과 마음을 불살랐던 지난 1년 특히 올해 유월을 애도하며.


내 오른쪽 대각선 앞 테이블에 한 여성분이 앉아 있다. 일본 여름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감성으로 무장한 듯한 차림에 <백만엔걸 스즈코>의 아오이 유우가 떠오른다. 흰 나시 원피스에 진청바지, 검은 슬리퍼, 가벼운 단발. 테이블 모서리에 벗어둔 검은 뿔테 안경. 맞은편 의자에 덩그러니 놓인 에코백과 검은 가디건. 여름의 푸른 숲을 그린 표지의 작은 책ㅡ제목을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선택은 두 가지. 용기를 내어 물어 보거나, 이 책이 운명이라면 언젠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될 날이 오겠지 하며 관두기ㅡ. 그리고 무엇보다 나무 도마에 놓인 사과 조각들과 투명하고 긴 유리컵에 꽂힌 수박 세 조각ㅡ지금은. 그녀가 몇 조각을 이미 먹었을 수도 있으니까ㅡ사과와 수박은 모을의 메뉴 '모을의 하루'의 여름철 과일들이다.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과와 수박을 나의 커피와 책 옆에 두고 그 조합이 이루는 단란한 풍경을 음미할 자격이 없다. 요즘은 좋아지고 싶은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좋아하고, 가 아닌 좋아지는 것. 그것이 내게는 언젠가부터 어떤 자격처럼 느껴져서다.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현상에, 하루에, 감정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자연스레 녹아들고 급기야 마침내는 내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자격과 특권인 것 같다. 세상엔 은밀하게 자격이나 특권의 문제로 편입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령 어떤 노래를 들으면서 울지 않을 수 있는 것 또한 어떤 경우에는 자격...특권이라고. 여성분의 자리에 여름 오후 5시의 따뜻한 햇살이 드리워졌다 거둬졌다 한다. 이것도 어떠한 자격 내지 특권일까. 일종의 여름의... 어쨌든 지지리도 후회스러운ㅡ아무 것도 안 했다는 죄책감에ㅡ7월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아직 남은 한 달에 위로 받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여름을 아주 온전히 좋아해서 가질 수 있는 자격이자 특권이라는 생각에...아메리카노가 갑자기 참 달다. 그러니 여름을 포착한 소설을 많이 써야지. 여름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소설을 많이 써야지.


참,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의 옆 페이지를 봐 봐. 뒤에 나뭇잎을 두고 썼더니 자국이 심하게 남았다. 활자의 자국들이. 소근소근, 종이가 우는 (Not crying) 소리 아니 그런 흔적이 있다. 좋았어, 이걸 편지지로 삼아야지. 시 한 편을 쓰고, 그 밑에 빈 종이, 그 밑에 나뭇잎. 그럼 가운데 빈 종이엔 쓴 사람조차 식별할 수 없는 흰 자욱들이 남겠지. 이 종이는 무언가를 감내한 종이다. 어떤 현상을, 하루를, 감정을. 잠시 나뭇잎의 안위를 살피러 간다. 혹 볼펜촉의 힘에 바스라졌을까봐. 무사하다. 빛깔이 아까 산 버섯향로의 덮개의 그것과 닮았다. 여름의 色. 곰팡이 핀 듯한 눅눅한 녹차의 色. 다시 햇살이 드리워진다. 기다리면 내 자리로 온다. 곧.


나중에 권미가 와서 나도 '모을의 하루'를 먹었다. 때로는 내가 아니라 곁의 소중한 사람 덕분에 그 자격이나 특권을 덩달아 누리기도 한다. 반띵하기로 해서 나도 수박 세 조각, 사과잼 바른 토스트 반절, 사과 2.5조각을 먹었다. 과일을 안 좋아하면서 왜 지금은 먹냐고 권미가 물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과일이야?'. 아니. 오히려 안 좋아하는 부류라고 대답했더니 더욱 의아해해서, 사과는 토스트랑 같이 먹으니까 안 시고 달아서 좋고 수박은 여름 감성이 나서 먹었다 했다. 웃기는 자식이라는 듯 권미가 웃는다. 수박을 다 먹으니 잔 아래 빨간 즙이 고여서 권미가 먹으라 했는데 거절했다. '이게 정말 맛있는 거거든'. 하지만 난 잔여물은 안 먹어. 무슨 잔여물이야. 권미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이 즙이 농축된 게 바로 지금 네가 먹고 있는 그 수박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난 원래 소바도 먹고 남은 국물은 안 먹어. 결국 권미가 그 즙을 흡족하게 다 마셨다. 대신 난 권미의 황매실 주스를 한 모금 뺏어마셨다. 여름의 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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