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는 글자의 모양
기타가마쿠라의 어느 고민가를 개조한 운치 있는 카페에서, 운명처럼 어느 시집 한 권과 만났습니다. 음악 앨범과 시집, 엽서가 서정적인 공간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독특한 감상을 자아내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편집숍 겸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보통 두 가지로 나뉘곤 합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살펴봐야지 싶은 것과 지금 당장 여기서 즐겨야 감동이 배가 될 것 같은 것. 이 시집의 경우엔 후자였기에 서둘러 손을 뻗었습니다.
아무리 서점을 좋아하고 일본어로 된 책도 가리지 않고 읽는다지만, 지금껏 외면해 오던 분야가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시였습니다. 문법이 비교적 정확한 다른 장르와는 달리, 시는 시적허용에 기대어 자유분방한 문장들이 많으니까요. 한국어로 읽어도 아리송한데, 일본어로 된 시라니 더더욱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해석하지 못할 게 뻔해, 하고 단정 지으며 시집 코너는 거들떠보지 않았죠.
하지만 이곳에서 우연히 별다른 기교 없이 새하얀 표지에 달랑 제목 한 줄이 적힌 소박한 시집을 발견하고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들어 본 적 없는 시인이었지만 일상과 맞닿아 있는 단순하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단어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내 무언가에 홀리듯이 덥석 구매해 자리에 가지고 와, 얼그레이 밀크티를 마시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언어를 완벽히 알지 못하기에 상상할 수 있는 시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요.
시를 읽다 보면 모르는 한자가 종종 나타나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해석하기 위해 번역기를 켜는 일은 삼갑니다. 대신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짜깁기하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심상을 그려 봅니다. 내 안에서 이렇게도 문장을 지어보고 저렇게도 지어본 뒤, 조금 더 가슴이 울리는 쪽으로 선택합니다. 한국어와 달리 한눈에 읽히지 않기에 글자를 한 글자씩 더듬어가듯 천천히 읽어 내려가게 됩니다. 따라서 눈이 읽기 전에 머리가 먼저 읽는 법이 없지요. 눈과 손, 마음으로 글자의 모양을 먼저 읽습니다. 너머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알지 못한 채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오래된 손잡이를 돌리듯 단어의 틈을 비집고 저 너머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 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의 자리에 생기는 공백은 나를 그곳으로 이끄는 통로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여차저차 다 읽어 내려간 시집에 남는 것은 일상에서 자주 듣는 익숙하고 단순한 단어들입니다. 새, 구름, 날개, 모래, 물… 그 단어들을 읽으며 상상할 수 있는 장면들을 머릿속에 자유롭게 그려봅니다. "모든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돼. 마음에 와닿은 말들만 슬쩍 건져 올리면 돼."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봅니다.
한국어로 읽었다면 평범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를 단어도, 나의 심상에 의해 재창조되어 그 순간의 마음으로 다르게 읽힙니다. 그러고 보면 시란 원래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걸 알게 하려고 이 시집이 운명처럼 제게 다가왔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무리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마음에 슬쩍 다가온 것들만을 품은 채 오래 곱씹고 사랑할 것을요. 일본에서 돌아온 지금도, 그 시집엔 아직 채 읽지 않은 시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오늘의 중심을 지키는 나다운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