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고 청순한 마음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by 위시

저번 주엔 한 일드를 새로 발견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습니다. 넷플릭스 한국판 제목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중학교를 막 졸업한 두 소녀, 키요와 스미레가 고향을 떠나 교토에 가서 마이코가 되기 위한 합숙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날이 두각을 드러내는 스미레와는 달리 무예에는 영 소질이 없는 키요는 얼마 있지 않아 다른 길을 알아보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키요에게도 두 눈을 반짝이는 자신만의 특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요리였지요. 우연히 모두를 위한 식사를 차린 일을 계기로 인정받아, 마이코 숙소의 담당 요리사 ‘마카나이상’이라는 직무를 맡아 주방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카나이상으로서 일하는 키요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마카나이상이라는 직무가 주어진 순간부터, 마이코가 되고 싶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해 울상을 짓거나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새롭게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 직진하듯 집중하지요. 점점 어엿한 마이코가 되어가는 스미레를 보면서도 자격지심을 갖지 않고서, 자신과는 또 다른 그녀의 길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기도 합니다.

꿈꿨던 길 그러나 알고 보니 자신이 넘보기 어려운 길을 직면하고서 돌아서는 것은 얼마나 아쉬운 일일까요. 그러나 키요는 자신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즐겁게 해냅니다. 그것도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무거운 자세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만들어 보여주는 정직하고 산뜻한 자세로요. 키요가 만드는 요리는 결코 호화로운 만찬이 아닙니다. 요리를 먹은 마이코 언니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칭찬합니다. "평범해. 그런데 맛있어!"


정식 마이코가 되기 위해 기모노를 차려입은 채 열심히 무예를 배우고 머리를 예쁘게 올리는 다른 소녀들 사이에서, 키요는 요리사 전용의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패턴의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채 매일 상점가와 부엌을 바삐 오갑니다. ‘안녕하세요!’하고 밝게 인사하며 상점가의 상인들과도 안면을 튼 키요는 다른 마이코 친구들과는 다른, 마카나이상으로서 자신만의 인연을 교토라는 마을에서 당당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런 키요가 했던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매일 부엌에서 식사 차리는 일이 질리지 않냐는 게이코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지요. 매일 아침 상점가를 오가며 오늘은 뭘 만들지 고민하고, 숙소 식구들의 그날 컨디션을 보며 담백하게 만들까 기름지게 만들까 정해 본다고요. 그러면서 항상 식사 준비를 할 때마다 식재료들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건넨 후 손질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맡은 바에 오롯이 집중하는 키요의 모습을 보며 ‘청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는 ‘청순한 마음’이란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초심자의 마인드와 비슷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타성에 젖지 않고 매 순간 이 일을 처음 마주하듯 설렘과 긴장을 안은 채 정성껏 임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이겠지요. 마카나이상으로서의 키요가 가진 마음이 바로 이런 청순한 마음일 것입니다. 마이코가 되지 못해 맡게 된 차선의 업무라는 식으로만 받아들였다면 절대 우러나올 수 없는 마음이지요. 무해하지만 야무진 투지, 꼼수 부리지 않는 정직한 솜씨 그리고 마카나이상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온전히 즐기는 마음. 홈베이킹 기구를 타고 싶어 장을 보며 추첨 응모권을 하나씩 모으고, 욕심을 내어 평소와는 달리 더 특별한 재료를 찾아 돌아다녀 보기도 하며 자신만의 소확행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성숙하고 즐거운 모습이야말로, 1인분 몫을 하는 참된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대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 재능을 타고난 동기들의 행보에 주눅이 들 때도 있고, 겨우 평타를 치는 것 같은 실력에 회의감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오롯이 설 자리가 마땅히 없는 것 같아 조급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에게 누군가가 인정하여 맡긴 업무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취업 전에 임시로 맡은 일’, ‘돈 벌기 위해 잠깐 하는 일’이란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은 만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어엿한 자리라고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고 청순하게 임해야겠다는 다짐이 솟아오릅니다.


그런고로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다시금 인사를 드립니다.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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