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죄송할 일은 없습니다
점심에 오랜만에 에디터로 일했던 회사를 방문해 편집장님과 식사를 했습니다. 이후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면서 편집장님께서 본인이 에디터로 막 발걸음을 떼던 젊은 시절, 조금이라도 더 찰떡인 배우를 섭외하여 화보 촬영을 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발 벗고 뛰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땐 "죄송한데요"란 말을 말버릇처럼 썼다면서요. "죄송한데요, 인터뷰를 요청할 수 있을까요?", "죄송한데요...". 지금 생각하면 뭐가 죄송한 일인지! 편집장님께서는 그때 일을 회고하며 장난스럽게 분개하셨습니다. 그렇지요. 자고로 에디터란 참, 죄송할 일이 많은 직업입니다.
인턴 에디터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제가 가장 확실히 배운 것은 글 쓰는 재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메일을 쓰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문을 여는 인사, 간결한 안부 그리고 보고하는 법과 요청하는 법 등. 하지만 세간에서 에디터에게 흔히 요구하는 또 하나의 덕목이 있었으니 바로 겸허함 즉, 자신을 낮추는 어투였습니다. 늘 누군가를 섭외하고 인터뷰나 촬영을 요청할 일이 많은 이 직업은 메일로 먼저 상대방을 노크하는 순간부터 쉬이 을이 되곤 합니다. 부디 우리 측의 부탁에 흔쾌히 응해주십사... 당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비위를 맞춰드리며 진행할게요, 약속하는 듯한 태도가 어느새 몸과 말투에 뱁니다. (누구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요!)
여러모로 죄송해야 할 일이 많은 막내 인턴 에디터로서 제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꼭 준수하고자 스스로 마음먹었던 철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함부로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 것. 상사에게든 거래처 상대에게든 마치 관성처럼 고개 숙이고 들어가려는 자세를 경계할 것. 일을 처음 배우는 신입 주제에 득의양양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죄송하다는 말이 단지 저뿐만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도 웬만하면 자주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는 걸 의식하는 일과 같습니다. 구태여 손해라고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미한 것이더라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기분이 유쾌해지는 일은 드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언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경직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확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가령 "회신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메일의 서두를 연다면, 과연 그 메일을 산뜻한 기분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요?
죄송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는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전하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지만, 함께 의견을 맞대고 업무를 도모하는 사이에서 주고받는 메일의 목적은 그보다는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메일을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메일을 쓸 때 제가 가장 유의하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마인드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을 주고받을 때보다 메일을 쓸 때 언어를 신중히 선택합니다.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나 문장을 긍정적인 뉘앙스의 그것으로 바꾸어 말하기 위해 고민하면서요.
그렇게 제가 일하면서 가장 자주 고쳐 쓴 문장은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였습니다. 가령 예상치 못한 일로 회신이 늦어졌을 때 무심코라도 '회신을 늦게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쩔쩔매며 급히 사과의 말을 쓰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바꾸어 전합니다. 회신을 늦게 한 나의 행동이 아닌, 회신을 기다린 상대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행동에 손해의 감각이 아닌 보상의 감각을 선물합니다. 같은 뜻이 담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마주했을 때, 사람은 더욱 너그러워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법입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메일도 보다 기분 좋게 읽어 내려갈 수 있지요. 메일을 주고받을 땐, 무엇보다 받는 상대가 기분이 좋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제가 저를 지키면서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세운 규칙이자 약속입니다.
그렇게 의식하며 메일을 쓰다 보면, 생각보다 일하면서 죄송할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사에게 보내는 메일 앞에 괜히 긴장하거나 과하게 자세를 낮출 필요 없이도, 전해야 할 말을 충분히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라도 '저 사람은 참 죄송할 일을 자주 만드는 사람이야'라는 이미지를 심게 되는 것을 경계합시다. 나의 잘못이 아닌 일에 습관처럼 사과를 남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나의 행동을 잠시나마 양해해 준 상대에게 제대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물론 업무적으로 정말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때는 주저 말고 진심을 담아 제대로 사과하도록 합시다. 그럴 때 제대로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죄송하다는 말의 경중을 신중히 여겨야 하겠지요. 나의 잘못과 잘못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능력과 그것을 차차 알아가는 배움이, 일하면서 얻는 귀중한 삶의 지혜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