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짐으로 이어지는 작은 성의
에디터로서 회사를 다닐 때 화장을 하고 옷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날은 손에 꼽습니다. 꼭 글을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모니터를 바라봐야 하는 어느 직종이나 그렇듯, 멋 내며 임해야 할 업무는 없기 마련이니까요. 개발자들이 후드티를 입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미지가 있듯 에디터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 없었습니다. 쌩얼에 머리를 질끈 묶고 편한 옷을 뒤집어쓴 채 하루종일 키보드를 두드릴 뿐이지요.
하지만 그런 저도 화장을 하고 멋을 부린 채 출근하는 날이 있었는데, 바로 인터뷰나 취재가 잡혀 있는 날입니다. 아무리 멋모르고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은 막내일지라도 인터뷰이나 브랜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때만큼은 어엿한 에디터이자 회사의 얼굴이니까요. 특히나 디자인 분야의 에디터인 만큼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사람이며 프로페셔널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것 같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습니다. 어리게 보이지 않도록 너무 대학생처럼 보일 것 같은 옷도 입지 않았지요.
그러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버거워, 한 브랜드와 인터뷰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장도 하지 않고 출근했던 적이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회사 근처 카페에서 평소보다는 다소 움츠러든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웃으며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하게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정중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온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 면목이 없었습니다. 외모나 차림새가 업무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평소대로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요. 하지만 그녀는 몰라도 저는 알았습니다. 괜히 떳떳하지 못하고 개운하지 못한 느낌이 인터뷰 내내 따라다녔다는 것을요. 앞으로 인터뷰나 취재로 상대측을 만나야 할 때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표하는 의미에서라도 아침에 시간을 들여 말끔히 차려입고 출근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이 일화가 떠오른 것은 어제 드라마 <대행사>의 클립 영상을 보다가 극 중 고아인 상무가 배원희 카피라이터에게 한 대사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후줄근한 차림새로 다니는 배원희는 업무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광고주 미팅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업무에 있어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파자마 입고 뉴스 진행하는 앵커 봤어? 광고주가 대행사 직원에게 요구하는 이미지가 있으면 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업무 아닌가?” 이 대사를 들으며 저는 그때 일이 떠올라 속으로 다시금 뜨끔했습니다.
업무를 하는데 도움은커녕 불편함만 주는 과도한 복장 규율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때로는 옷이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들도 존재합니다. 상황에 맞는 단정하고 정중한 차림새는 분위기를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고, 업무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 자체도 달라지게 만들지요. 비록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아도 스스로가 느끼는, 옷을 말끔히 차려입었을 때의 자신감과 떳떳함이 있지요. 옷을 제대로 차려입음으로써 기여할 수 있는 업무의 효율은 곧 그 사람의 역량으로도 이어집니다.
취재가 있던 또 다른 날, 보라색 점프슈트를 입고 출근했더니 대표님께서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엄마에게 그걸 전하니, 평소에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좋겠다는 핀잔을 돌려 말하신 것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런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줄 전혀 몰랐지만, 진실이 어떻든 너무 해이해진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면 안 된다는 반성을 했습니다. 자율복장이라고 해서 편할 대로만 다니라는 뜻이 아닐 테니까요.
옷을 단순히 정중하게 차려입는 것을 넘어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 위한 저만의 TPO 룰도 있는데요. 취재를 해야 하는 전시나 공간, 브랜드의 이미지나 핵심 컬러에 맞게 그날의 코디를 고르는 것입니다. 온통 검은색 가구를 만드는 디자이너를 만날 때는 검은색 치마, 톡톡 튀는 크리에이터 미디어 기업과 만날 때는 위에서 언급한 보라색 점프슈트, 캐주얼한 의류 브랜드의 디자이너와 만날 때는 밑단이 디스코로 벌어지는 청바지 등. 비주얼을 캐치하는 디자인 분야의 에디터답게 디테일을 신경 썼다는 것을 표현하려 합니다. 비록 상대는 그러한 저의 마음까지는 알 길 없겠지만, 상대 브랜드나 크리에이터를 향한 존중을 표하는 작은 성의인 셈이지요.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지금은 보이는 이미지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줄었지만,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에는 TPO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옷차림으로 증명할 수 있는 나의 역량도 있다는 것. ‘일만 잘하면 되지.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해?’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업무로만 증명하려는 고집보다 오히려 쉬운 또 하나의 스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