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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원 Jan 23. 2020

비디오 예약녹화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슬픔은 반으로 줄고 기쁨은 두배가 된다.

지금은 유튜브가 빠르다. 잘 이용하진 않지만 넷플릭스도 있고, 급한데로 tv와 연결된 BTV를 통해 처음보는 영화와 다시보고싶은 드라마를 기다림없이 볼수 있다. 짧고 간결하며, 원하는 부분만 볼 수 있다. VOD (video on demand)라는 ‘요청 동영상’ 서비스가 절정인듯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광고도 같이 봐야 한다는 정도? 그 외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1988년에 우리집에는 비디오 생겼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는 금성전자에서 나온 ‘메리트 88’이라는 VTR이었다. VCR이랑 VTR의 차이는 모르겠다. 전문적인 VCR은 Video Catridge Recorder, 즉 카트리지에 녹화하는 방식으로 전문적인 방송국에나 활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VCR은 Video Cassette Recorder, VTR은 Video Tape Recorder, 카세트에 녹화하느냐, 테이프에 녹화하느냐, 결국 카세트 테이프에 녹화하면 VTR이나 VCR이나 같은 말이다. VCR이 좀 더 대중적인 표현이다. 금성전자 ‘메리트 88’은 예약 녹화 기능까지 되는 ‘비디오’였다. DVD플레이어와 비디오 테이프를 동시에 틀수 있는 기계이전에 비디오 테이프만 재생할 수 있었던 플레이어로서 녹화기능은 물론 예약 녹화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은 독보적이었다. 예약녹화, 그리고 그것을 리모콘으로 할수 있다는 사실은 어린 나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1년전 세탁기, 올해는 비디오, 1988년은 그야말로 가전제품 풍년이었다)

하지만, VTR이 있으면 그게 VTR인지 VCR인지는 ‘컨텐츠’가 있어야 했다. 매번 빈테이프(공 테이프)에 녹화된 영상만 다시본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우리집에는 신문이 왔었고, 신문에는 tv편성표가 있다. 당시에는 24시간 tv방송시절이 아니었다. 아침 6시에 첫방송, 10시에 중단, 낮시간엔 별다른 특별방송이 없으면 쉬었다가 오후 5시30분경 재개, 밤 11시 정도에 마무리되는 식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낮시간 쉬는 일 없이 이어갔다. 아버지는 신문에 나오는 tv편성표를 보시고, 형과 나에게 토요일의 ‘권투경기’나 ‘특선영화’같은 걸 녹화해달라는 미션을 주셨다. 형은 나보고 하라고 다시 미션을 주었다. 국민학교 3학년이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비디오의 설명서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고 읽었다. 마침내 성공했다. 예약녹화를 성공한 것이다. 오후 3시, 15시부터 1시간 30분간 mbc에서 방송되는 국군의 날 특선영화 예약녹화에 성공했다. 혼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때부터 가전제품을 다루는데는 자신감이 생긴것 같다. 좀 복잡하긴 해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 풀어낼 수 있을것 같았다. 넘지 못할 것 같은 벽이라는 넘사벽을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목표 설정은 된 것이고, 벽을 세운 사람들, 그러니까 이제껏 해온 방식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벗어나기만 하면 넘지 못할 벽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하면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비디오는 리모콘 조정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약 녹화기능이 있어서, 저절로 켜졌다가 저절로 꺼졌다. 문제는 TV에 대한 대응은 비디오 설명서에 나와있지 않았다. 예약녹화하는 동안 그 시간에 tv를 켜야 비디오에 녹화되는거라 판단한 나는, 화장실도 못가고 tv앞에서 오후 3시가 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TV에는 리모콘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걸 몰랐을까. TV가 켜져 있지 않더라도 비디오는 저절로 녹화를 한다는 것을. TV화면을 녹화한다고 착각하고 비디오가 제 기능을 수행할 때는 TV도 당연히 켜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아버지의 예약 녹화 주문, 가끔 형과 누나의 교육방송 예약녹화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좋았던 감정이 슬슬 ‘짜증’으로 바뀌었다. 이건 나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비디오는 좋지만, TV가 후진 것이라더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아예 몇시간동안 TV를 켜놓고 말았다. 절약이 몸에 벤 아버지는 전등이나 TV가 잠시라도 켜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시질 않는다. 더 황당한건 TV의 녹화가 되려면, 볼륨 역시 듣기에 적당한 볼륨으로 맞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약녹화하기 위한 TV영화를 나는 이미 녹화할때 한번 본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주말이나 다음번 휴일마다 다 같이 녹화된 영화를 보자고 하니, 나는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었다. 형과 아버지는 예약녹화기능을 몰랐고, 내가 기능을 알려주었다. 설명서를 통해 발견한 예약 녹화기능이 TV를 같이 껐다 켰다 하는 불편함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의 자유시간을 잡아먹는 귀찮은 애완동물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예약녹화 담당은 형이다. 한두번 해보더니, 형은 예약녹화가 시작될 시간인데도 TV 전원을 켜주러 오질 않았다. 실수하면 안되는데, 아버지가 꼭 해놓으라고 한건데, 조마조마한 나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고, 심지어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혼나면 어떻하지? 나의 걱정이 절정으로 치닫을즈음 비디오는 저절로 켜지더니 예약녹화가 시작 되었다. 그런데 TV가 켜지지 않았다. TV를 켜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만하다가 뒤늦게 켰다. 형의 임무를 도와주는 나였지만, 조금 늦게 TV를 켰고, 조금 늦게 TV를 껐다. 녹화상태가 좋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녹화는 여느때와 똑같았다. TV를 켜고, 끈 시간은 비디오 녹화시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볼륨마저 듣기에 딱 좋은 상태로 녹화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TV를 켜지 않아도 녹화가 되었다. 나는 여태 무엇을 한 것인가. 녹음기를 생각했나보다. 녹음기의 기능에 사로잡혀서 예약녹화와 녹음기를 착각했나보다. 모르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나보다.

모르면 물어보지. 다 안다고 생각했으니, 심지어는 먼저 안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오만했을까. 형과 아버지는 이런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당신들의 흑역사가 아니므로 잊었겠지. 이젠 나도 잊으련다.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일거라 생각하고, 내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유출되거나 탄로날까봐 그냥 고통을 감당했다.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을 배울때 다시 비디오 예약녹화 생각이 떠올랐다. 쇄국정책, 신미양요, 병인양요, 지금 생각하면 역사적인 오판이고, 비디오 예약녹화와 TV와의 관계는 개인사의 오판이다. 참여와 개방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범위에서 나를 발전시켜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혼자사는 세상이 아니다. 일기장속의 나도 혼자가 아니고, 세상도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혼자이고 싶을때도 있다. 그럴때는 ‘나’를 잊어선 안된다. ‘나’에서 ‘너’로, 그리고 ‘우리’를 보는 지혜를 갖는다면 충분하다. 사소한 일상에서의 대화, 가족과의 대화가 삶의 활력소가 된다. 혼자서 이겨내야할 고통과 고난, 걱정은 그리 많지 않다. 수다쟁이와 과묵함은 그 사람의 별명이 될 수 없다. 사람은 변할수 있고, 다양한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변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론 위기는 기회가 되듯이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은 불평불만만 가득할수 없고, 또 불행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오는 사소한 행복은 늘 즐겁기만 하는 일상에서 오는 큰 불행을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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