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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나의 의견을 분명히 이야기 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라!

by 권호원

스포츠를 좋아했다. 스포츠 경기 보는 것을 좋아했다.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할수 있는 것이라곤 많지 않았다. 유치원 이후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할머니가 바쁘시거나 시장에 가시면 혼자 있어야 했다. 할머니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유치원에 돌아오는 막내 손자 밥을 차려주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두가지. 첫번째는 오이냉국, 두번째는 상추쌈이었다. 오이냉국은 여름철에 시원하게 먹을수 있어서 좋았다. 상추쌈은 정말 상추에다 밥, 그리고 할머니표 특수 조제된 쌈장이었다. 예나지금이나 입이 짧았기 때문에 ‘밑반찬'이나 ‘국'같은 건 필요없다. 말그대로 ‘원푸드'면 됐다. 한가지 반찬으로 그냥 한끼를 먹었다. 특히, 상추쌈을 잔뜩 먹고 나면 졸음이 온다. 낮잠 잘 자고 나면, 학교에서 돌아온 형이나 누나가 있었고 이어 아버지가 퇴근하셔서 저녁을 맞이한다. 자연스레 방청소와 간단한 정리는 잠에서 깬 내 몫이었다. 사랑방, 안방, 가운데 방을 쓸고 닦는 일은 어렵지는 않지만 상당히 지겨운 일이다. 이런 정리이외에 내가 취할수 있는 것이 한가지가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집 신문을 가장 먼저 읽는것이었다.

당시 시골집이었던 우리집엔 아침배송 신문이 아니라, 낮 시간에 ‘우체부 아저씨'가 배송해주는 ‘우편물'이었다. 서울신문, 한국일보, 동아일보가 기억난다. 가끔씩 우체부 아저씨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편물이 메일오진 않았지만, 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신문을 받아야 하는 나는 낮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야 했다. 인사하기 싫어서 몇번은 안방이나 가운데 방에 숨었던적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인사를 드렸다. 친구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때 전종하란 친구가 있었는데, 종하 아버지 직업이 우편배달원이셨다. 매일 배송되는 신문은 포장은 없다. 그냥 신문을 접어서, 그 위에는 재활용 재질의 노란색 완장크기의 띠에 감겨있었다. 신문배송에 필요한 우표는 10원짜리였다. 나중에 30원, 50원정도까지 늘어났지만, 나는 그 우표도 열심히 모았다. 당시 우표모으기 취미를 본적있다. 그런데 사용했던 우표였기 때문에 모아봐야 값어치는 없었고 그저 ‘모았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빈 노트에 우표를 모아놓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기에 형이나 누나가 학교에서 가져온 다쓴 노트에다가 붙였다.

제일 먼저, 신문을 받아보는 국민학교 1학년생에게 ‘서울신문'은 어려웠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재미가 ‘1도'없었다. 참고로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신문구독을 중단한적이 없다. 현재의 신문은 가로쓰기 방식에 의해 왼쪽으로 넘긴다. 신문을 펼쳐놓으면 1면을 좌측으로 넘기면 2면이 나온다. 당시 서울신문은 세로쓰기였으므로 묶음은 오른쪽에 있다. 그리고, 오른손(혹은 왼손)으로 오른쪽으로 넘겨야 2면이 나왔다. 세로쓰기는 이내 가로쓰기로 바뀌었지만 한자도 많이 섞여있었고 정치, 경제, 사회 분야는 재미도 없었다. TV뉴스가 재밌으면 나이 먹은거라고 하는데, 유치원 국민학교 1학년에게는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신문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한페이지를 넘기는 스포츠면이 제일 먼저 나온다. 요즘 신문처럼, 신문의 묶음을 왼쪽으로 놓고 왼쪽으로 넘기면 신문은 마지막페이지 정도가 되는데, 날씨와 오늘의 운세, 그리고 스포츠 기사가 나온다. 그때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프로야구’와 ‘마이클 조던'이었다. 당시 마이클 조던은 미국 프로 농구 선수로서 1차 은퇴 이전의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때였다. LA레이커즈의 매직존슨을 상대했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이겨내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기사는 마이클 조던의 ‘내기 골프', ‘도박관련 소식'이었다. 중학교 때 미국 프로농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이클조던이 얼마나 대단한지 (혹은 위대한지)를 느끼기 전까지는 ‘도박하는 농구선수'정도였다.

프로야구에 대한 기사는 놓치지 않았다. TV중계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가끔 봤다. 그나마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권투나 축구 중계가 없어야 프로야구를 볼수 있었다. 중계방송보다 신문에 나오는 스코어보드를 먼저 접했던 것이다. 스코어보드와 각 분야별 선수들의 기록들을 줄줄 꿰차고 있었다. 타격왕은 김성한, 홈련은 장채근과 김성한, 투수는 선동렬, 이강철, 조계현 등 해태 타이거즈는 다른 팀은 넘볼수없는 경지였다. 1번 타자였던 이순철이 진루하면 2번타자 한대화, 3번타자 김성한, 4번타자 장채근, 5번타자 서정환, 6번 김봉연, 백인호, 김종모 등등의 선수들은 다른 팀들은 이겨낼수 없었다 절대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삼성라이온스, 롯데 자이언츠 등 프로야구 출범 당시 팀들은 해태 타이거즈 앞에서는 늘 지기만 했다. TV중계를 모르고, 신문에 나온 스코어보드만으로 야구를 배웠던 것이다. 배웠다기 보다는 아는체 하기에 딱 좋은 수준이었다. 학교 친구들과 대화에도 스코어는 내가 제일 많이 알았기에, 그에 걸맞는 실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했다. 어찌보면 글로 배운 스포츠였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전라도 경상도는 지역감정의 대명사였다. 고려시대 초기 훈요십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차령산맥 이남 인물을 등용치 말라) 나는 경상도, 경상북도, 북부, 안동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전라남도에 있는 광주 광역시를 연고에 둔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다. 그냥 해태 타이거즈 성적이 좋았고, 선동렬의 방어율과 결정적인 삼진, 김성한의 홈런, 이순철의 도루 등이 짜릿했다. 뭘 좀 아시는 아버지와 형에게 나는 ‘미운 오리새끼'같은 특이한 취미를 가진 아들이자 동생이었을테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솔직한 감정에 충실한 어린시절의 팬심이 지역감정에 의해서 ‘거기 좋아하면 안돼~’라는 어른들의 말이 너무 이상했다. 당시 누나는 한창 장편소설 태백산맥에 심취했던 때였고, 나는 가끔 ‘광주에 가서 해태 타이거즈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도 꾸었다. 하지만, 안동에서 광주가는 길은 없었다. 아버지도 광주에 가보신적이 없었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분들이나 동네 아저씨들에게 물어봐도 광주를 다녀온 분들은 없었다. 고속도로가 확충되지 않아 ‘1일 생활권'이 안되었던 건 이해가 되지만, 광주에 숙소가 없을리 만무한데 광주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다니, 국민학교 1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집에 한국 지도가 있었다(나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 참조) 광주는 멀지 않아보였지만, 내가 광주를 처음 방문한건 26살때였으니 광주는 참 먼 곳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에 어떤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일본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 수준은 아니지만, 당시 경상북도에서는 반 전라도 정서가 강했다. 1986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자'의 선거 유세를 들었다. 다른 것보다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교했었고, 많이 발전시켜주겠다고 했다 전라도 보다 더. 여러 차례 유세의 주요 키워드는 ‘전라도 보다 나은 경상도'였고, 수건과 고무신, 식사대접을 받았다. 선거권이 없는 국민학교 1학년에게도 수건과 고무신이 배정되었고, 수건 나눠주는 분에게 다시 한번 가서 인사하면 수건과 고무신을 한번 더 받을 수도 있었다. 경상북도에 있으면서 삼성 라이온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삼성전자 가전제품보다 금성전자나 대우전자 가전제품을 좋아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때 첨으로 전자시계를 선물받았는데, 그 시계의 배경이 롯데자이언츠였다. 할머니와 2일과 7일, 5일 차이로 열리는 ‘5일장'에 자주 갔었다. 5일장 할머니 단골 건어물 가게 옆에 야구모자 파는데서 OB베어즈 모자를 구경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팀은 해태 타이거즈, 두번째는 롯데 자이언츠, OB베어즈가 3위였다. 만약 베어즈 모자를 구경이 아니라, 할머니가 사주셨으면 거의 1등이 될뻔 했는데..

해태 타이거즈를 괴롭혔던 빙그레 이글즈는 너무 싫었다. 홈런왕 장종훈, 이정훈 등의 신예들의 등장으로 해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해태 타이거즈만 잘 되야했는데, 역시 스포츠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을 아주 찐하게 배웠다. 지역감정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에 맞설 힘과 용기는 없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솔직한 표현은 지금보다 훨씬 당찬 나였다. 야구는 삼성 라이온즈라는 어른들의 대화에도 맞서서 신문에서 읽은 스코어 보드, 선동렬의 볼 스피드, 이순철의 도루갯수, 김성한의 홈런 갯수 등을 무기로 대응했다. 설득에 있어서 숫자의 활용은 예상보다 강력하다. 숫자는 곧 이성을 의미하고 근거와 논리가 된다. 흔히 대한민국에 대한 흔한 평가는 자연자원이 부족한데, 인적자원을 통해 성장이 견인되었다는 것이다. 예정된 결과, 뻔한 결과, 노력에 의해서 바뀌지 않을 과정이라면, 의외로 심심하고 지겨워진다. 전쟁과 기아 상태를 벗어나는 최소한의 경제적인 자립이후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바로 ‘권태와 허무'이다. 예상된 삶을 살아가는 안정감도 중요하지만, 나의 노력으로 주어진 삶이 아닌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시도가 더 값어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어리니까,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니가 부럽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내 의견을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용기의 원천은 경험과 지식이다. 경험은 직접과 간접 경험, 그리고 지식과 고민의 결과란다. 상대방과 나의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의 의견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갖춘 용기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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