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가르침은 위대하다.
패션의 완성이 ‘자신감’인지 ‘얼굴’인지 골라라!
나는 ‘얼굴’이라 생각한다.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감보다는 나았기 때문이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4학년때까지는 어머니가 사주신 옷만 입었다. 5학년때는 트레이닝복만 입었다. 6학년이 되었다. 4학년때까지 입었던 헐렁한 바지는 싫었다. 국민학교 때 신체발달검사 결과는 ‘가’로 시작해서 ‘바’로 끝났다. 국민학교 입학시절 131cm에 25kg이었으므로 ‘가’였다. ‘가’는 매우 마른 체형, ‘나’는 마른 체형, ‘다’는 보통 체형, ‘라’는 통통한 체형, ‘바’는 비만을 나타냈다. 1학년 (첫 술~ 참조) 비로소 4학년이 돼서야 ‘라’정도됐지만 여전히 마른편이었다. 한가지 반찬으로 한끼 밥을 해결하는 원푸드 식단이었다. 마른 몸도 별로였지만,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펑퍼짐’한 바지만 주셨다. 통 넓은 바지는 환기도 잘되고 편했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펑퍼짐한 바지속에 가느다란 다리가 들어있으니 허전했다. 그 허전함 달랠 길이 없어 통이 좁은 바질르 원했다. 하지만, 통이 좁은 바지는 청바지였고, 청바지는 상대적으로 비쌌다. 보다 정확히 ‘그냥 입자~’는 마음이 컸다. 왜냐하면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6학년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신체발달 검사는 ‘다’에서 ‘라’정도로 옮겨가고 있을 무렵 키도 많이 자랐다. 5학년 내내 입은 트레이닝복이 지겨워졌고, 그것만 입고 다닐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원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펑퍼짐한 것만 아니면 되었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지를 입다가, 어머니가 사주신 옷, 그리고 트레이닝 복이 전부였던 내가 ‘쫄바지, 일자바지, 힙합바지, 나팔바지 등’을 알리가 만무했다. 같이 시장에 가서 입어보고 골랐으면 좋겠지만, 왜 그랬는지 귀찮았다. 나의 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허벅지는 편안하고, 종아리쪽은 달라붙는 스타일’ 어머니가 자주 거래하던 옷가게 아주머니는 ‘그런 걸 원해? 좀 이상할텐데.. 입어보면 별로일텐데..’라고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어머니도 그 옷을 알았기에 사오지 않으셨다. 내가 원하는 바지 대신 사온 바지는 ‘골덴 바지’였다. 편하고 따뜻했지만 나에겐 ‘골덴’은 어린이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심사숙고한 끝에 사오신 바지였으므로 열심히 입었다. 그 시절은 왜 그리 지퍼고장이 많았던지, 아니나 다를까 6학년 가을부터 입던 골덴바지도 중학교 입학하기전에 ‘지퍼’가 나갔다. 열린 남대문은 닫히지 않았다. 양초를 발라보기도 했지만 지퍼는 금새 벌어졌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상황이었으므로 어머니는 다시 바지를 사러 가셨고, 나의 끈질긴 설득에 못이겨 ‘허벅지는 헐렁하고, 종아리는 붙는 바지’를 사오셨다. 나의 입학식 바지를 사오신 것이다. 어머니도 막내아들이 중학교 입학할때 깨끗한 옷을 입히고 싶으셨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제법 비싼 것으로 골라오셨다고 했다. 입학식을 하루 앞둔 3월 1일 저녁 그 바지를 보았다. 정말 깜짝놀랐다.
내가 요청한 바지는 ‘독일 장교 승마바지’였다. 누나와 형은 크게 웃었고 나는 크게 울었다. 아버지는 처음보는 ‘승마바지’를 보고 ‘껄렁한 애들이 입는 옷’이라고 규정하셨고, 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가장 당황하셨고, 이미 저녁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다른 대안은 없었다. 입학식 아침, 나는 ‘승마바지’를 입고 주변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쟤 뭐야? 승마 특기생인가?’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껄렁껄렁 대는 아이인가?’ ‘초록색 승마바지, 대단하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믿던 내가 패션의 완성은 ‘자신감’으로 실천해버렸다. 교장 선생님인지 학년 주임선생님인지 모를 분의 당부 말씀 도중에도 ‘단정한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전혀 단정해보이지 않고, 심지어 어른 흉내내는 국민학생의 모습이 입학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인정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초록색 ‘독일 장교 승마바지’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고등학교때 옷장 아래쪽에서 만났지만, 둘둘 말아서 더 밑으로 구겨넣어버렸다. 정말 중학교 입학식 운동장에 서있던 내 모습을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그날 이후 어머니가 사주신 옷만 입었다. 물론 그 시기는 길지 않았고, 용돈을 받아 내가 옷을 사는 경우가 늘어났다. 중학교 입학식날 이후, 패션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버렸고, ‘얼굴’은 원래 안됐으니 나의 패션감각은 ‘테러리스트’ 수준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가 가장 깔끔한 스타일이라는 것을 왜 그리 부정했던지, 어울리지도 않던 7부바지는 왜 그리 입고 다녔던지, 내가 생각하는 내 얼굴과 내 패션은 아주 심각했다. 위 아래 색상 배치는 물론, 단정하지도 않았다. 교복이 제일 잘 어울렸다. 대학교 때는 후배 지훈이 도움으로 ‘과감해 지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몸에 벤 촌스러움은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힙합바지에 형광색 프린트 티셔츠를 시도했지만, 다른 선후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하늘색 셔츠에 면바지’가 제일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10년 전 어머니가 해주신 바로 그 스타일이었다. (승마바지 사건 이후 나는 어머니가 사주신 옷만 입었다.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은 아직도 자랑스럽게 꺼낸다. 하지만, 내가 산 옷들을 입고 찍은 소풍이나 수학여행 사진은 도저히 쉽게 봐줄수 없다)
어머니 학력은 ‘국졸’이지만, 세상 어떤 분들보다 현명하셨다. 비록 리모콘이나 핸드폰, 가전제품을 다루는데는 익숙하지 못하시지만 그 어떤 분들보다 현명하고 지혜롭다. 참을성을 알려주셨으며, 관찰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목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몸소 보여주셨고, 꾸준함의 위대함도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알려주셨다. 하지만, 나도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어머니와 동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 의견을 무시했던 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막내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참을성과 꾸준함’을 알려주셨다. 다시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승마바지를 입고 입학식을 치루던 경험’보다 더 화끈거림을 느낀다. 어머니는 내게 ‘너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거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려고 알면서도 봐주신 것이다. 그리고 직접 겪어보기 전에 어려움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주셨다.
지금은 어머니 옷을 사드리는 입장이다. 어머니께 용돈을 넉넉하게 드리진 못하지만, 어머니가 입으실만한 옷에 대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그때 내게 주셨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닫고 실천하는 ‘나만의 현재진행형 효도’인 셈이다. 어머니는 ‘독일장교 승마바지’를 아실려나? 더 늦기전에 어머니에게 중학교 입학식때 입은 승마바지 이야기를 한번 해봐야겠다. 이 책에 기록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지워지겠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