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부끄러운 일도 괜찮다!
요새들어, 부끄러움이 생겼다. 2019년 4월부터 적고 있는 독서노트와 아침조회 노트, 일상노트, 그냥 낙서장, 여름마다 이어지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제출용' 소재꺼리 작성용 노트가 있다. 항상 오른손에 들고 다닌다. 35살때, 사회인 야구에 관심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야구 복장으로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질문이 디씨인사이드 게시판에 올라왔다. 사회인 야구 복장으로, ‘예식장, 자녀 병원, 식당, 돌잔치, 직장 후배 병문안, 가까운 친척 장례식장 등등' 기상천외한 답변들이 이어졌다. 나의 이번 초록색 슈렉 독서노트는 어디까지 가봤을까? 참치회집, 오징어회집, 치킨집, 갈비탕집, 물론 병문안, 장례식장은 물론, 화장실, 주방, 야구장, 축구장은 물론, 헐렁한 츄리닝을 입으면 바지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때문에 서울 대전 대구 강원 지역까지 내가 갔던 거의 모든 지역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찬이랑 떠나는 토요일 축구 연습때 용찬이가 시합에 들어가면 늘 슈렉 독서노트를 펼친다. 그때부터 그냥 적어본다. 적다보면, 예전 생각이 나고, 예전 생각에 낯이 화끈 거릴때가 있다. 이때부터 이상반응이 생긴다. 용찬이가 축구 연습을 1년가까이 다녔으므로, 한달에 3-4번, 그리고 1년이면 30번 내지 40번은 족히 다녔다. 이때마다 슈렉 독서노트에는 어릴시절 ‘흑역사'가 여러번 등장했다. 번뜩 생각났다.
어린시절 추석 명절이었을려나, 작은 아버지가 아식스 트레이닝 상하의 한벌을 가져오셨다. 크기나 우선순위, 맞춤 정도 등 모든 것이 형에게 맞는 아식스 트레이닝복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고 싶은걸 어떻하나~ 겉으론 쿨한척, 형 입어~ 하지만, 나에게도 입어볼 기회가 있을것 같다는 만연한 기대감을 만들게 하는 형의 ‘놀림'이 나를 화나게 했다. 그냥 ‘미안미안 미안마~’ 수준이었을터.. 별거 아닌 말장난이지만, 친척들이 모인 명절, 아식스 트레이닝을 받은 형이 나한테 이럴수 있나? 나는 마당 빨랫줄에 널려있던 형의 농구화, 그것의 혓바닥 부분 - 당시 농구화는 신발끈 묶는 부분 스펀지 쿠션이 상당했다. 발등을 보호하는 목적이었던지, 아무튼 형의 농구화는 그랬다. 세탁을 위해 신발끈 풀고 농구화를 빨랫줄에 널어 놓으면 항상 소의 혓바닥처럼 튀어나와있다 - 을 집어들고 형에게 휘둘렀다. 형을 맞출 생각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사춘기 시절의 형은 아주 가볍게 피해버렸다. (좀 맞아주지~ 그런데 맞았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하게 휘두른 농구화는 나의 코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고, 나는 그걸 피할 재간은 없었다. 그 즉시, 왼쪽 생코피, 쌍코피보다는 약하지만, 무방비 상태에 외부 충격에 의해 발생한 ‘생'코피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수 없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생각은 점점 깊어진다. ‘고해성사'가 바로 이런 것일까? 고해성사를 통해서 나의 부끄러움이나 나의 죄의식이 사라지고, 다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것. 마음속 부끄러움을 밖으로 표현했을때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고해성사도 이런 느낌이리라 상상해본다. 여기서부터 또 딜레마다.
내가 아는 사람중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 몇 명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회사 생활하면서 가끔 현명한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인생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우리 엄마'를 꼽는 편이다.) 그 중 한명이다. 보험 영업을 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괴로울까? 늘 고민하고, 전략을 만들어야 하니, 힘든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상품을 권해야 하고, 나를 위한 상품보다는 가급적 상대방을 위한 상품을 이야기해야하지만, 결국엔 많은 돈을 거둬들여야 나의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라는 것을 상대에게 티나지 않게 설득해야 하다보니, 반성, 잘못함, 나의 순간 욕심에 대해서는 늘 양심의 가책 비슷한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겪은 일과 그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조화를 찾을 즈음에 종교 이야기가 나왔다. ‘영업은 상대방의 재화를 얻어내야하니, 그건 잘못된 방식입니다~’라는 그 사람의 이야기에 대놓고 ‘상대의 재화를 통해 내 재화를 늘리는 것은 맞지만, 필요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고민하고 나서 이뤄지는 재화의 교환이기 때문에, 그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이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어진 이야기는 ‘고백과 토로’를 통해 잘못이 없어지는 것이 맞느냐, 그 잘못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짊어지는 것이 맞느냐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내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불교의 가르침’과 ‘고백과 믿음’을 통한 마음의 평온’을 가리치는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치와 종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기호이자 취미, 특기라고 생각하기에 논의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볍게 던진 이 한마디에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모든 일의 잘못, 즉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제안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갖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기독교에서는 불교처럼 ‘원인은 나로부터, 그러니 내가 해결해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고백과 용서 (혹은 망각), 앞으로의 다짐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오직 ‘믿음'이라고 했다. 믿지 않은 자와 믿는자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요약하다보니, 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종교는 ‘마음의 평안’임은 잘 알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 하나님을 믿기만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를 믿으니, 모든게 내 잘못이라 너무 괴롭다는 내용~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내 딜레마가 조금씩 풀려간다. 인간이기 때문에 적절한 기억과 망각의 반복이 삶인 것이다. 내 인생은 영원히 즐거울수만은 없다. 행복의 크기도 사람마다 다르고, 행복의 강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잘못에 대해 드러내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슈렉노트처럼 (혹은 고해성사처럼) 본인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것은 분명하다. 힐링과 망각은 큰 차이는 없어보인다. 가족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이뤄진다. 끝으로 너희 형제들은 트레이닝복을 놓고, 운동화 들고 다투지 않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