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커서 큰 집이 아니라, 우리가 ‘커나온 집’이기 때문에 ‘큰집’이다
내 생일은 양력이다. 부모님과 누나, 형 모두 음력 생일이다. 나만 양력이다. 사실, 음력 생일과 양력 생일을 왜 구분하는지는 모르겠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른 것이니까 강조할 순 있어도 강요할 순 없다. 나는 우리집에서 셋째다. 형제관계는 나보다 6살많은 누나와 4살많은 형, 그리고 나 삼남매다. 아버지는 46년생, 어머니는 49년생이다. 한국전쟁 전후 세대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쪽 형제는 동생인 작은아버지 뿐이다) 누나와 형이 태어나던 시절 우리 나라 출산정책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와 같은 산아 제한 정책이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도 그걸 염두해 두셨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남매로는 적다’는 제안에 따라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내가 태어난 날은 1979년 5월 17일이다. 목요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이 고조할아버지 제사 날짜와 겹쳤다. 고손자의 생일과 기일이 겹치니 고손자의 생일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과 달리 내 생일은 날짜가 변하지 않은 양력 생일로 정했다.
우리집은 제사가 많았다. 종가집은 아니었지만, 종가집 종손께서 어릴적부터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그 일을 대신했다. 실질적인 종손역할을 하였지만, 종손이 아닌 상황이었다. 종손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종손이라는 표현이 더 옳다고 본다. (현재 종손은 나랑 동갑이다. 나보다 항렬로 한대가 늦다. 내가 37대, 종손은 38대손이다. 종손과 장손, 종가집과 큰집이야기는 나중에) 우리집은 소위 ‘큰집’이었다. 몇해전 명절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큰 집은 크키가 큰 집이 아니다. 바로 커나온 집이다. 자란 집이다. 우리집이 큰 집인 이유는 여기서 자랐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집 가장 큰 어르신은 부산에 계신 작은 할아버지다.(인생 갈비탕을 사주신 바로 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시다. 작은 할아버지의 아들, 딸 모두 우리집을 큰 집으로 생각하고 명절마다 찾아온다. 큰집의 가장인 우리 아버지가 일찍 공무원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큰집으로 오는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몫이었다. 더불어 장손인 아버지는 제사까지 모셨다. 앞서 종손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문중에서 종손 역할까지 도맡았다. 다행히 집 근처에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종가집 제사는 서원에서 일부 나눠서 했고, 우리 가족은 4대조의 제사를 모시면 그 뿐이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8명의 제사가 별거겠냐 하겠지만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산에 작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기준은 부산 할아버지의 4대조가 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5대조, 형과 나 입장에서는 6대조 제사를 지내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일부일처제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증조할머니가 두분인 경우도 있다. 내가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날 태어난 것이 우연인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제사 지내는 날을 짐작하다보면 ‘누나와 형이 제사가 없는 날에 태어난 것’이 더 신기한 것이다.
어림잡아, 연 20회가 넘는 제사가 있었다. 아버지 기준으로 잠시 살펴보면, 바로 윗대인 아버지와 어머니 (즉,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제사가 있다. 동생인 부산 할아버지는 살아계시지만, 막내 동생은 행방이 묘연하다. (한국전쟁 이후에 월북하신것으로 판단, 아직 살아계시리라 믿는다) 조부모, 조모가 한분 더 계셨다. 형제분들도 계셨고, 증조할아버지도 형제가 몇분 되신다. 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도 형제가 몇분 더 계신다. 1800년대 초반으로 흘러간다. 게다가 1년에 두번씩 큰 명절은 있다. 설날과 추석에도 차례를 지낸다. 자연히, 제사음식인 떡과 과일은 넉넉했던 편이다. 그러나 공무원 집안의 살림살이 자체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 음식은 제사이후에만 먹을수 있었다. 제기에 담긴 음식은 절대 손댈수 없었고, 소중하게 다뤄야했다. 제사는 12시에 지내야만 했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잠이 많았던 나는 비로소 4,5학년이 돼서야 12시 제사를 지낼수 있었다.
어릴적엔 다 그런줄 알았다. 대한민국 모든 가정이 제사를 이렇게 많이 지내는줄 알았고, 명절엔 이렇게 많이 사람들이 모이는 줄 알았다. 3, 4학년 추석때는 30명이 넘었고, 심지어는 마당에 텐트를 치는 일도 있었다. 차에서 자는 경우도 있었다. 5학년때 집을 리모델링 했던 이유 중 하나도, 친척들이 왔을때 잠자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주방’마저 현대식으로 바꾸어 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아랫목’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어쩜 추석이나 설날, 왜이리 많은 분들이 오는지, 우리집만 이러는건지 고민하다보면, 제사지내야하고, 제사지내다보면 명절이 왔다. 명절에 북적북적하는 집이 싫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명절에 TV에선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그거 제대로 한번 보지 못했고, 제사준비하느라 가족여행은 물론, 외식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추석이 지나면 설이 오고, 설이 오면 조카들, 손자들 세뱃돈을 주려는 어른들 덕분에 넉넉하진 않았지만, 세뱃돈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 삼남매는 오랜만에 오는 친척들의 심부름을 도맡았다. 음식상을 나르거나, 물 떠와라, 병풍은 어디있는지, 손톱깎이는 어디 있는지, 빈봉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이불과 베게가 모자란다 등 숙박에 관련된 모든 일은 큰집 자녀들의 몫이었다.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서 모여든 친척 어른들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했다. 심부름 많이 시키지만, 세뱃돈 넉넉히 주시는 아재들도 좋았고, 센스있는 아지매들은 내가 좋아하는 선물들을 사주셨다. 중학교 2학년때 받은 노래 테잎인 ‘강산에 1집, vol 0’은 말그대로 테잎이 늘어질때까지 들었다. 국민학교 고학년 시절까지는 방학이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입맛대로 골라갈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추석때 마당에 텐트를 치는 것도 재밌었다.
많은 제사들과 많은 친척들이 북적거리는 우리 집이 다시 그리워진다. 우리만 3남매일뿐 작은 아버지를 비롯해 대부분이 둘이거나, 하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명절에 큰집에 못오시는 일이 생겼다. 사위를 보거나, 며느리가 생긴 분들도 계시므로 당신들의 큰집인 우리집은 당신들의 자녀에겐 큰집이 아니었다. (그들이 커나온집은 우리집이 아니다!!)
이제 명절 풍경은 단촐하다. 추석때는 제법 모인다. 겨울 명절인 설날에는 우리 가족들만 모인다. 부모님 두분과 누나, 형 내외와 조카 둘, 우리 가족 4명, 최대로 모이면 11명이다. 내가 커나온 집인 우리집은 나에게 여전히 큰 집이고, 큰집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우리 집 제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10여년쯤 전, 파향제사도 지냈다. 부산 할아버지의 4대조가 아닌 아버지의 4대조로 줄였고, 그 중 직접적인 조부모님들 제사만 지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집의 제사횟수는 연 10회 안팎이다. 제사상도 단촐해졌다. 제사의 횟수와 제사상의 크기는 변했지만, 제사지내는 시간과 제사 멤버인 아버지와 제사 준비멤버인 어머니는 변함이 없다. 근처에 사시는 친척 아주머님이 계신데, 몇해전 인공관절 수술을 하시는 바람에 더이상 제사준비멤버가 아니다. 제사 이후에 식사하러 오시라 하기조차 번거롭고 힘겨운 일이 돼 버렸다.
제사의 횟수와 풍경은 달라졌지만, 내 마음속 제사는 변함없다. 불편한데 왜 그렇게 많이 해? 무슨 의미가 있어? 살아있는 사람이 편하게 사는게 더 좋지 않아? 그렇게 엄격한 집안이야? 왜 그렇게 해야해? 상반기 하반기 나눠서 두번만 하면 안돼? 다양한 뉘앙스와 의미가 담긴 ‘제사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진 않는다. 제사 지내는 것에 대해 ‘논리와 이성’을 접목하면 비논리적이고, 무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우리집은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보자면 옳은 말이다. 그 많은 제사 준비를 위해 고생하셨을 우리 어머니, 아버지 모두 대단하신 분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이고, 설령 믿지 않으셨어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두분의 끈기가 대단하다. 앞으로도 많은 제사가 남았지만, 앞으로 남은 제사를 과제나 숙제라 여기지 않는 건강한 정신세계를 갖춘 분이다. 그런 분이 나의 부모님이라 너무 감사하다. 많이 부족한 나지만, 그래서 실수와 잘못을 많이 범한다. 내가 힘들때, 내가 실수를 범하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슬럼프에 빠졌을 때, 부모님이 살아오신 궤적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다 잡을수 있었다. 때론 나아가야할 곳을 잃어버려 힘들어 하는 나에게 명절과 제사를 통해 가야할 곳을 알려주는 듯 했다. 온몸으로, 전생애 걸쳐 알려주신 것이다. 종교가 마음의 안식이자 평온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우리집 제사’가 갖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제사는 유교 실천 행위의 한가지가 아니냐,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하면 안된다, 불교는 제사를 지내느냐 등 특정 종교의 실천 행위로서 제사가 아닌, 내 마음속의 평안은 ‘제사와 명절’이다. 나는 내 생일이 양력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너무 좋다.
시대에 따라 명절과 제사의 풍경과 겉모습도 달라졌다. 나에게 명절은 ‘휴식과 평화, 번영과 안정’ 그 자체다.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도 좋지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도 좋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바라는 게 더 필요하다. ‘올해는 항상 좋은 일만 있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보다는 ‘지치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 일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세요’라는 기도가 더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