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이 필요하면 이유와 쓰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말할것~!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적는건 한계가 있다. 오래되거나 비슷한 기억이 겹쳐지면, 상황에 따라 기억은 변형되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큰나무가 작은 나무에게, 그 후 30년’의 존재 이유와 한계점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기억은 무한한듯 하지만 유한하고, 유한한듯하지만 무한하다. 그리고 기록은 기억을 앞서는 경우가 많다.
뜬금없는 ‘기억론’의 시작은 이렇다. 어릴적 우리집에는 저금통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동색 (요즘도 이런 색 표현을 하는지 모르지만) 보다 짙은 검정에 가까운 코끼리 저금통이었다. 그 저금통은 왜 우리 집에 있었을까. 그것이 문제다.
첫번째 기억은 작은아버지가 주신것 같다. 당시 서울신탁은행에서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일하시는 은행원이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승용차를 샀으며 (엘란트라),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여행 (태국)을 다녀오신 유일한 분이다. 1989년 1월 해외여행 자유화라고 하니, 은행에서의 포상으로 다녀오신듯 하다. 태국의 상징인 코끼리, 나중에 내가 태국에 갔을 때도 그런 저금통을 본 듯하다. 코끼리의 등 부분에 움푹패인 동전 넣는 곳에 동전을 넣으면 코끼리의 머리가 끄덕끄덕 거리는 저금통이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의 선물인듯 하고.
두번째 기억은 누나가 산것 같다. 1988년이면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지만, 나보다 6살이 많은 누나는 중학생이었고, 국민학교 수학여행과 중학교 수학여행을 두번이나 가본 수학여행 쪽에서는 우리 가족 최고의 경험자였다. 수학여행지야 경주나 설악산이었겠지, 설악산에 가면 ‘산머루 금다래’ 액기스와 손수건, 그리고 목공예 비슷한 이 고동색 코끼리 저금통을 사오지 않았나 짐작된다.
지금도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기회가 되면 작은아버지와 누나에게 물어봐야겠다. 누가 사오신거냐고, 아니 그 저금통 기억 나느냐고.
어떻게 그 코끼리가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코끼르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잔돈을 꽤 모았다. 지금도 매우 알뜰하신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임동면 사무소, 북후면 사무소, 그리고 퇴직직전에는 서후면 사무소에서 합해서 33년 가량을 근무하신 그야말로 지방 공무원이셨다. 매우 알뜰하셔서, 점심 드시고 나서 남은 잔돈을 모으기로 유명했다. 그 잔돈으로 구입한 장농은 여전히 우리집 사랑방에 자리잡고 있다. 삼익가구. 원목가구. 10자반 크기. 아직도 튼튼하다. 어떻게 거스름돈 동전으로 가구를 살수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세가지다. 매우 오랫동안 돈을 모으셨고, 당시에는 금리가 높았고, 가구 가격이 저렴했다. 금리와 물가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게.
아버지의 열정적인 저축으로 코끼리는 배가 채워졌지만, 나의 몹쓸 호기심이 코끼리 배 쪽에 있는 ‘출구’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동전을 1/3쯤 끼워서 돌리면 그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동전’들은 아무 이유없이 내 앞에서 때구르르 굴러왔다. 처음에는 얼마가 모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열어봤다. 생각보다 많았고, 100원이 없어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00원을 갖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깐돌이’, ‘아폴로’가 너무너무 맛있었는데, 엄마는 불량식품이라 먹지 말라고 했다. 먹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어길수도 없었지만 같이 등하교를 하던 영준이와 동휘, 그리고 경호형이 가끔씩 건네주는 아폴로와 깐돌이의 맛은 잊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용기라기 보다는 그냥 코끼리 배를 열고 100원씩, 200원씩 꺼냈다. 수법은 대담해졌고, 한번에 꺼내는 돈의 양도 많아졌다. 이젠 학교 앞 깐돌이가 아니라 100원을 넣고 왼쪽으로 한바퀴 돌리면 나오는 장난감 뽑기까지 이르게 됐다. 장난감을 사준적없는 부모님이 보기에 새로운 장난감이 생기고, 학교 끝나고 집에와서 밥 먹기보다는 조금 더 놀다가 불량식품이나 과자 사먹는 재미가 더 커졌다.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적는건 한계가 있다. 여기서부터 기억이 갈라진다. 코끼리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는 것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아니 걸렸는데 부모님이 아무말씀 안하신것 같다. 말씀하셨는데 내가 잊어버린걸까. 그럴리는없는데, 아니면 국민학교 2학년, 집에서 막내면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잘 무마해주신 할머니의 도움이었을까, 어느순간 코끼리 저금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치운걸까. 따끔하게 훈육하시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할머니가 말리셨을까. 나는 엄청나게 혼날 일을 저지르고도 형이나 누나의 1/10도 안되게 혼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형은 그런 내가 얄미웠겠지만, 당시 나는 할머니의 그런 ‘커버’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마 할머니의 지혜가 나를 구해준 것 같다. 막내는 충분히 그럴수 있다. 야단치면 오히려 빗나갈수 있다.
그 때 그 사건 이후 한동안 저금통은 사라졌고, 국민학교 고학년 즈음에 다시 등장했다. 그때는 호봉이 높아진 아버지의 잔돈은 더 늘었지만, 저금통에 손을 대진 않았다. 내가 손대지 않은 덕분(?)인지 그 저금통은 지금 우리 엄마가 가장 아끼는 ‘삼익가구 10자반 크기의 장농’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지네.
용돈이 없었기 때문에 저금통에 손을 댄 것은 아니다. 저금통에 손을 댄 것이 잘 한 행동도 아니다. 지금 이렇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지혜롭게 마무리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저축하는 습관보다 중요한 것은 왜 저축을 해야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저축할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